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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Aug 11. 2022

자고로 며느리 직업은

"어머니가 네 직업 때문에 신경 쓰이나 보더라고?"


구 남자 친구가 밥을 먹다 말고 던진 말은 충격이었다. 내 직업이 어때서?

듣자 하니, 구 남자 친구 현 남편에게는 외사촌 형이 하나 있는데 이혼을 했단다. 그리고 그 와이프가 나와 같은 직업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뭐? 그 사람과 직업이 같으니 우리도 결국 이혼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따져 들었다.


눈치 챙길 줄 모르던 남자 친구가 손을 휘저으며 나에게 전달한 내막은 이랬다. 이모가 그 전 며느리에 대한 험담을 어머니께 자주 늘어놓았는데, 그 내용이 직업과 무관하지 않았다. 직업이 그렇다 보니 성격이 어땠고, 때문에 그 결혼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류의 이야기들. 구 남친 엄마, 현 시어머니 영희씨는 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나 또한 같은 직업에 같은 성정의 여성일까 걱정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그에게 발끈했고, 결혼하지 말자로 응수했다. 그런 편협한 시어머니는 나도 노땡큐야 인마.



끝까지 노땡큐 할 집념이 없었던 탓인지, 나는 결국 그녀의 며느리가 되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내 앞에서는 전 조카며느리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내 직업에 대한 그녀의 볼멘소리는 의외의 곳에서 터져 나왔다.


결혼 후 그녀는 나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래, 지인이는 월급을 얼마나 받는 거니?

부모님도 캐묻지 않는 월급 액수를 시어머니가 노골적으로 물어오니 당황스러웠다. 깜빡이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그 질문에 진땀을 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대충 둘러대노라면 그녀는 가족끼린데 뭐 어때를 주장하며 다음번을 기약하곤 했다.

나에게서 이렇다 할 정확한 숫자를 얻어내지 못한 그녀는 곧장 다른 이의 월급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 주인공은 가깝게는 자신의 딸, 멀게는 아무개집 며느리 정도 되었다. 때때로 이야기의 선후가 바뀌기도 했다. 그들의 월급에 대한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면 내 월급에 대한 후속 질문이 이어지는 식으로.


그 집 부부는 둘이 합쳐 얼마를 번다더라.

우리 딸은 연봉이 이렇다더라.

그래 지인이는 얼마나 벌어?


섣부르게 짐작해보자면, 그녀가 엄선한 내 직업의 최대 단점이 연봉이었으려나 싶다. 그래서 그토록 열심히, 내 입으로 그 숫자들을 말하게 하려 했던 것일까. 남들이 말하는 내 직업의 좋은 면들에 대해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 모두를 압도할 만큼 그녀에게는 내가 벌어오는 '돈'이 심각한 이슈였을 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희씨는 자신의 딸이 이 직업을 갖기를 줄곧 바라 왔다고 했다. 이루지 못한 자녀의 장래희망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그녀는 월급을 캐묻는 것 외에는 직업에 대한 코멘트를 무척이나 아꼈다.


그런 그녀도 출산 후 육아휴직을 쓸 때만은 제법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육아휴직을 비교적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며느리의 직업에 그녀는 꽤나 점수를 주는 듯했는데, 물론 직접적으로 그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다만, 아이는 엄마 손으로 돌봐야 한다 말하며 그녀가 고개를 주억이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우습게도 동시에 그녀는 우리 가정의 줄어든 수입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 년 넘게 육아휴직이 이어지자 그 염려의 말들은 더욱 잦아졌다. 둘이 벌다 하나가 버는데 생활이 되느냐부터 시작해, 돈 돈 돈의 랩소디가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충분히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는데도, 그 말을 자꾸 듣다 보면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돈을 벌지 않아 우리 가족이 아주 제대로 망해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얼마 전 한국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우리에게 돈돈돈 하였다. 결제해야 할 상황이 생길 때마다 영희씨 내외는 자신들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럴 때면  계산대 앞에서 남편과 시부모님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서로 계산하겠노라 막고 늘어지는 장면이 이어졌는데, 그 틈에 영희씨는 '아들이 너무 가난해' 본인들이 계산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종일 그녀로부터 돈과 관련한 근거 없는 날 선 비난에 시달린 남편이 결국 '우리도 돈 많다.'를 시전 하였으나, 영희씨는 '아들네가 너무 거지 같다.'며 기세 좋게 맹공을 이어갔다. 신선하게 뜨악스러웠던 '거지'라는 단어는 나의 귀에 선명하게 때려 박혔다.

남편아, 우리 거지니?



남편의 해외 발령 때문에 휴직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안부전화에 대한 이상한 압박감에 수화기를 들었다. 남편과 아이 없이 나 홀로 대낮에 하는 안부전화는 그녀의 돌발 발언에 혼자 맞서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대화가 무사히 오고 가는 듯했지만 역시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지인이 너는 대체 하루 종일 뭐해?"

"네? 저요?"


그녀는 나더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 두고 하루 종일 무엇하느냐고 되물었다. 아, 집안일하고 장도 보고 카페도 가고 책도 보고... 눈치 없고 미련한 나는 내가 그날 했던 일들을 사실에 근거해 두서없이 읊었다. 그녀는 짧게 '그래'했고, 통화는 갑작스럽고 뜨뜻미지근하게 마무리되었다.


불쾌감이 진하게 몰려온 건 그렇게 찜찜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의 말에 담긴 숨은 메시지가 나를 덮쳤다. 그녀는 나의 하루가 정말 궁금했던 것일까. 남편은 회사 가고 아이는 유치원 보내 놓고 '놀고'있을 나에 대한 빈정거림 혹은 경고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는 '남편 덕에' 휴직하고 -휴직 전에 실제로 들었던 말이다.- '놀고먹는' 며느리였을지도.


그렇담 일생의 대부분을 전업 주부로 살아온 그녀에게  또한 되묻고 싶다. 어머님은 하루종일 대체 뭐하셨어요? 저도 어머니랑 별반 다르지 않겠죠 호호호.



그녀는 내가 벌어오는 금액이 마뜩잖았다. 손주는 며느리가 직접 돌봤으면 하고 바랐지만 나의 육아휴직으로 아들네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견디지 못했다. 게다가 아들 '덕'에 내가 휴직하고 '놀고먹는'것은 더더욱 못마땅했으리라.


다시 복직을 하면 그녀는 또 불현듯 옆구리를 찌르며 이번 달 월급을 캐물을 것이다. '둘이 합쳐 얼마나 버니'로 시작하는 기출 변형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그 무례한 질문을 무해하게 웃으며, 별 일 아니란 듯 내뱉을 테다. 그런 한편 그녀는 내가 손주를 성실히 등하원 시킬 수 있을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손주가 너무 늦게까지 남의 손에 맡겨지지 않도록.


근무시간이나 업무 강도는 육아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이면서, 연봉은 떵떵거릴 수준의 일등급 며느리가 아니어서 그녀에게 죄송하다. 아주 죄송스럽기가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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