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지인 Apr 11. 2023

그런대로 안온한 날들

가을, 겨울이 지나고

잔뜩 쌓여 터질 것만 같던 내면이 아슬아슬했던 날들, 울렁거려 뭐라도 쓰지 않으면 내가 피폐해질 것 같은 날들, 글쓰기가 숨통을 터주는 날들이 여름과 함께 지나갔다. 열기로 가득 찬 계절만큼 부글대던 내면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식어갔다.


꼭 계절때문만은 아니다. 서늘한 바람이 막 시작되던 가을의 초입에, 우리 가족은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일상이 급변했고, 생활의 정비로 바빠지면서 내 마음의 어지러움은 뒤편으로 제쳐두려 했다.


그럼에도 귀국의 설렘에 앞서 내 내면은 조금은 소란하고 어지러웠다. 물리적으로 가까워지는 영희씨 내외와의 거리 탓이었다. 지난 몇 년간 대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들을 이제는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컸다.


불안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입국 일정이 명료해짐과 동시에 영희씨 내외의 간섭도 그 모양새가 아주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아들 내외의 입국과 정착에 따른 사사로운 일들에 이래라저래라 감 놓고 배 놓는 일들이 시작됐다. 주로 아들의 귀와 입을 거쳐 내게 전달되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우리는 반드시 너희를 만날 것이다. 입국하자마자!”


그 메시지는 '공항에 마중을 나가겠다.' '너네 서울 빈 집에서 우리가 미리 묵고 있으면 되겠다.' '남이섬이 좋다던데 그 김에 남이섬에 같이 놀러나 가자.'로 매 통화마다 변주되곤 했다.


듣는 나로서는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새벽 입국 일정도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운데다, 일이 꼬여 다음날 바로 복직을 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챙길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는데, 신경 쓸 거리가 더 늘어나는 셈. 우리 부부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그들만의 계획이었다. 일들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뵈러 가겠다고, 당장 무턱대고 오시면 우리가 더 불편하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달까. 그냥 저희 좀 내버려 두세요, 두 분이 아니어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예요, 딱 그 심정이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몇 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시부모일 수가 없었다. 입국장에서 부둥켜안으며 눈물의 상봉을 할 만큼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간 그만큼 살뜰히 며느리를 대해주지도 않았으면서 만류를 거듭하고 마중을 자처하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손주. 나는 그들이 자신의 욕구, 손주가 보고 싶은 욕구 그 하나에만 충실하다고 느껴졌다.


‘귀국 준비하랴 복직 준비하랴 수고가 많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 천천히 만나면 되니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해라.’ 내 부모에게 그 무렵 들어온 말들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더욱 이기적이었다.


여러 말이 오고 갔지만 결국 영희씨 내외의 모든 말은 늘 같은 결론으로 치달았다.

‘해외이사, 복직, 출근, 정착 준비 그리고 그에 따른 수고와 고단함은 모르겠고 일단 우리는 너희(보다는 손주였으리라)를 한시도 지체 없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리라.‘


구구절절한 내막은 각설하고, 그들로 인해 귀국 전 마지막 며칠은 제법 시끄러운 나날이었다. 귀국한 아침 출국장을 벗어나기도 전에 남편과 내 핸드폰은 영희씨 내외의 연락으로 번갈아가며 울려댔고 나는 비로소 귀국을 실감했다.


아! 나 한국에 돌아와버렸구나!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 영희씨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느라기 시절은 지난 일이라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화면에 ‘어머님’ 세 글자가 보이면 모든 사고가 일시정지 모드로 전환됐다. 보이스톡, 페이스톡보다 더 선명하고 또렷한 영희씨 목소리는 내가 한국에 돌아왔음을 또 한 번 실감하게 했다.


"한국도 왔으니 이제 전화도 자주 하고 많이 만나야지." 영희씨는 청유도 강압도 아닌 묘한 모양을 한 문장을 나에게 던졌다. 예전 같으면 며느라기 모드로 '네 어머님 당연하죠.'를 숨도 안쉬고 내뱉었을 테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으리 이미 수없이 다짐을 해 온 내쪽에서는 말끝을 흐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지난 두 계절동안 나는 영희씨 내외와 적절한 담을 쌓으려 애썼다. 너무 가깝지 않게, 나를 지킬 수 있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연락이고 만남이고 휘둘리지 않을 만큼만.


그러나 여전히 영희씨는 '목소리 듣기 힘드네.' '한국에 있어도 만나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의 언동을 서슴지 않으신다. 울리는 벨소리에 통화 버튼을 누르며 ‘네 어머님.' 하는 내 첫마디가 끝나면, 저쪽에서 ’목소리 듣기 힘드네.‘가 튀어나온다. 며느리와의 통화, 그 첫번째 안부 인사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영희씨만의 아엠파인땡큐다. 그것은 뼈가 있는 말이다.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만나야만 한다는 뼈.



영희씨와 교류의 빈도를 줄였더니 제법 안온한 날들, 글쓰기로 울분을 쏟아내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그 몇 안되는 만남과 통화에서도 영희씨는 꾸준히 좋은 글감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제법 아름다운 날들이었고, 그날들에 영희씨와의 역사를 굳이 들추어내어 쓰는 일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임시 저장에만 열심이었던 두 계절을 돌아보며 다시 쓰기에 박차를 가해보려 한다. 영희씨가 준 소중한 글감들을 부족한 솜씨로 재단하며 쓰고 또 쓰고 미완의 글이나마 내놓겠다, 나를 다잡는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글. 일상에서의 기습으로부터 담대하게 나를 지켜낼 힘을 기르기 위한 글쓰기. 여러 허울 좋은 이유를 갖다 대보면서, 내면의 위기 상황이 아닐 때도 부단히 글쓰기를 해나가겠다 다짐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자고로 며느리 직업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