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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Oct 11. 2023

며느리야, 한우를 보내줄 테니 먹어보렴

그 전화를 받은 날은 볕이 따뜻한 겨울 오후였다. 남편과 카페에서 각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에어팟 너머 노이즈 캔슬링을 통과한 노이즈가 귀를 때렸다.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니 난처한 눈알을 굴리며 통화 중이다. 누구? 하는 입모양을 보내니 어머니!라는 입모양이 돌아온다. 그러고 곧 핸드폰은 나에게 넘어왔다. 미안! 하는 입모양과 함께.


내게 넘어온 전화기에서는 영희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는 김에 버스 택배로 소고기를 좀 보내주겠노라 했다. 그녀의 택배에 진절머리가 나있던 때라 냉큼 네,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기요? 라며 의미 없는 말만 한 번 더 되풀이했다.


그래 고기! 

영희씨가 말하는 그 고기는 지난 여름, 고향 마을에서 한우를 한 마리 잡았는데 거기서 사 온 것이었다. 그 내력이야 익히 들어왔다만 1월 오늘, 그것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단다. 일전에 영희씨가 그 고기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덧붙였던 말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거기서 사 온 고기 질겨서 못 먹겠더라, 앞으로는 그렇게 사지 말아야겠어라고 혼잣말처럼 조잘거리던 말들. 그 고기로 만든 갈비찜이 질겨서 못 먹겠노라 투덜댄 영희씨가 부득불 그 고기를 보내준다니. 아무래도 이건 고기 선물을 빙자한 냉장고 털기가 아닐까 라는 삐딱한 촉이 왔다. 


고기를 줄 생각에 신이 난 영희씨에게 그날도 반사적으로 조금만 주세요, 아주 조금만, 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내심 '그' 고기가 '이' 고기가 아니겠지 일말의 기대도 해보면서. 그리 질겨서 못 먹겠다 하던 고기를 귀한 아들네 집에 보내줄 리가 없다고 믿으면서. 전화기 너머 영희씨는 정말로 조금 보내겠노라 확신에 찬 답을 했고 나도 그대로 믿었다. 속고 또 속지만 그래도 또 기대해 보던 아둔한 날들이었다.


그날 저녁 늦게 남편이 터미널에서 택배를 픽업해 왔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내게 냉동 고기라 냉동실에 넣어놨다고만 전했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불현듯 냉동실에 있다던 고기가 떠올랐다. 아이 국거리로 쓰겠노라 영희씨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저녁으로 소고기 국이라고 끓여주려 해동해 놓을 참이었다. 그러나 냉동실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내 저녁 계획은 바로 무산 돼버렸다.


냉동실 안에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단단해 보이는 고깃덩어리 네 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덩어리가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크고 단단한 고깃덩어리. 그것도 네 덩이가. 아! 탄식과 한숨이 이어졌다. 한눈에 봐도 꽤 오래 냉동실에서 버텨온 고깃덩어리들이었다. 비닐을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닐 여는 수고를 덜어주려 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인지, 그 고깃덩어리들은 얇은 위생팩에 넣어져 입구를 쩍 벌린 채로 얼려져 있었다. 네 덩이 모두 하나같이 비닐입구가 열린 채로 펄럭, 펄럭. 밀폐는커녕 한번 휙 묶여있지도 않은 채 배송된 냉동 고깃 덩어리를 믿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혹시 어제 받아온 고기 비닐을 네가 일부러 다 푼 거니?

아니, 온 그대로 냉동실 넣은 거야.

그래, 그렇담 이 비닐은 원래 이렇게 열린 채로 얼려져 있었던 것이로구나. 


신개념 비닐 포장에 당최 무슨 부위인지도 모르겠는 이 거대한 덩어리를 째로 냉동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기발하고 참신했다! 내가 미친 건가 싶은 순간.


일단 오늘도 지켜지지 않은 부질없는 조금만, 의 약속은 차치해 두고. 나는 이 거대하고 무성의하게 내팽개쳐진 냉동 덩어리에 화가 났다. 분명 국거리 조금만 받겠다고 했지만 내게 배송된 저것들은 소통의 간극에서 연유한 것일까 아니면 일방적 무시의 결과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거대한 냉동덩어리를 어떻게 먹어야 하는 걸까. 한번 해동하면 다시 냉동은 못할 테고. 해동한 김에 다 써야 할 텐데, 세 명이서 무얼, 몇 끼를 해 먹어야 저걸 다 해치우려나. 용기 없는 나는 차마 영희씨에게 전화를 해서 따져댈 마음은 안생겼다. 이번엔 분명히 조금만 보내주실 거라고 믿어보자고 확언한 그녀의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눈에 이것은 조금으로 보이냐며. 그러자 어젯밤 냉동고에 넣을 때 별 생각이 없어서 몰랐다, 어두웠다, 녹을까봐 급히 넣기만 했다, 남편의 난처한 변명이 이어졌다. 


그래, 이제는 못 참겠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완곡하게, 그러나 다시는 안 받겠다는 메시지는 전달할 고-오-급 기술이 필요한 카톡을 썼다 지웠다 했다. 고깃덩어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글자를 썼다 지웠다 하는 내가 웃기고 한심했다. 관계에 금을 내지 않을 이모티콘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전송을 눌렀다. 


십 분도 채 안되어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나를 위해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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