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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Oct 13. 2023

고맙다는 인사나 들을 줄 알았더니, 고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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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 날숨- 두어 번 들이쉬고 내쉰 다음, 전화를 받았다. 영희씨는 냅다 그게 양이 많니, 로 포문을 열었다.

썰어서 국도 끓여 먹고 구워도 먹고 그러면 끝날 텐데! 이어지는 그녀의 말들은 참 쉽다. 언제나 그랬듯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나는 결혼 후 7년이나 지나고서야 그날 처음으로 이렇다 할 내 목소리를 내보았다.


어머님, 저희가 이걸 어떻게 다 먹겠어요. 이렇게 덩어리로 꽝꽝 얼려주신 걸 말이에요. 한 번 녹이면 다시 얼릴 수도 없는데.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이제 '양'의 문제를 떠나, 해동 후 재냉동이 불가능하다는 내 말에 의문을 품었다.


아니이-, 칼로 썰 수 있을 만큼만 살짝 해동해서 뚝딱 썰고 소분한 다음에 다시 냉동실에 넣거라. 그러면 여러 번 먹을 수 있지. 왜 못 먹어.


어머님, 해동한 것 다시 또 재냉동하고 그렇게 먹으면 안된대요.


나는 이 자명한 사실을 마치 누구에게 들어서 알게 된 마냥, 말의 어미를 살짝 바꾸었다. 보이지 않는 전문가에게 기대어 말을 전하면 그녀가 납득을 할까 싶어서. 내가 말한 게 아니고 원래 그런 법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어지는 말은 역시 내 기대와 한참 어긋났다.


누가 그래?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나는 이제 상상 속 전문가의 존함을 대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아니, 어머님 누가 그러는 게 아니고요. 당연한 건데. 그렇게 자꾸 해동한 거 재냉동하고 그러면 배탈도 날 수 있고. 세균이 번식할 우려도 높아지고요.


어쩌고 저쩌고 이어지는 나의 '깔끔 떠는'말을 그녀는 듣기 싫다는 듯 단칼에 잘라냈다.


배탈은 무슨, 그렇게 평생 해 먹어도 아무 탈 없더라. 안죽어. 너무 별나게 그렇게 살림하면 안된다.


살림은 쥐뿔도 모르면서 위생에 미친 사람쯤으로 나를 치부하는 그녀의 말에 신물이 났다. '냉동한 음식을 해동했다가 다시 재냉동해도 되느냐'를 논제로 한 대토론에서 무참히 패한 나는 이제 다른 이슈로 넘어가본다.


어질어질해진 이 대화를 다시 본론으로, 네 덩이의 거대한 고깃덩어리로 초점을 맞추며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머님, 왜 이렇게 덩어리째 보내셨어요? 왜 소분도 안하고 이렇게 덩어리째로 얼려 놓으시는 거예요?


고기 맛이 떨어져서 소분해서 냉동하면 안돼. 덩어리째 얼려야지.


저 이런 생고기 손질 못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 저희는 이렇게 많이 먹지도 않을뿐더러, 필요한 용도에 맞게 때마다 조금씩 사다 먹어요.


정육점에서 썰어서 포장해놓고 파는 고기들은 죄다 질이 안좋아. 잘라 놓고 파니까 무슨 부위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잖아.


전국의 정육점을 모두 사기꾼 취급하는 뚱딴지같은 그녀의 말에 역시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보내온 이 덩어리들이 옳다는 소리일까.

 

알겠어요, 다 그렇다 치고 이건 대체 어떻게 해 먹어야 하는 거예요? 무슨 부위인지라도 알려 주세요.


무슨 부위? 그건 모르지, 그냥 떼온 채로 냉동해 놓은 거야. 적절히 봐가며 잘라서 먹어봐.


정육점 고기나 그녀의 고깃덩어리나 무슨 부위인지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나보다. 앞뒤가 안맞는 그녀의 말들에 나는 점점 전의를 상실했다.



더 이상은 못참겠다, 뚫린 입으로 말을 해보자며 패기만만하게 시작해본 대화였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의 세계를 무참히 짓밟는 영희씨의 처절한 몰이해, 무논리에 내 세계는 늘 함락당하고 만다. 다른 이슈가 필요했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어머님, 혹시 그러면 그렇게 많이 사오셨다는 한우를 누나네에도 주셨어요?


그래, 당연히 줬지.


그럼 누나네 주실 때도 이렇게 덩어리째 얼려서 주셨어요?


맞아, 걔네도 이렇게 줬지. 근데 걔는 자기 시어머니가 있잖아. 시어머니가 살림 살아주는데 시어머니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 걔는 그런 거 할 줄 몰라. 살림 하나도 못하거든.


이 무슨 개 같은 소리일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확 오른다. 아, 이래서 화병이라는 게 생기는구나 절감하는 순간이다.


어머님, 누나가 못한다고 하셨죠? 형님이 못하시는 건 저도 못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라고 별 수 있어요? 저도 결혼하기 전에 살림 안해봤고, 이런 고기라고는 다뤄볼 일이 없어요. 어머님 딸이 못하는 건 저도 못하는 거예요.


그 말에 영희씨는 내게 헛소리라도 들은 양 내 말에 반박을 시작했다.


아니, 걔랑 너랑은 다르다니까. 걘 정말 하나도 몰라 살림에 관심도 없고.  


어머님, 저도 살림에 관심 없어요.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제가 형님보다 못하면 못하겠죠. 왜 저한테만 이런 걸 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걘 정말로 못한다니까, 하려야 할 수가 없어.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걘 아무것도 못해,를 되풀이하던 영희씨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지인이 너, 할 줄 모른다고 자꾸 안하면 안돼. 뭐든 해봐야 늘지. 안하면 안 느는 법이야. 이런 것도 손질 못해먹으면 너희는 대체 뭐 해먹니?


이런 것 손질 안하고 살아도 알아서 잘 먹고 산답니다.



첩첩산중인 그녀와의 대화에 마지막 한 굽이가 남아있었다. 네 덩이의 고깃덩어리 중 유독 모양이 일정하고 각진 상태로 얼려진 한 덩이가 있었다. 그 한 덩이는 얼핏 보기에도 나머지 고깃 덩어리와 색이며 모양이 달랐다.


어머님, 그리고 개중에 한 봉지는 양지? 그런 건가요? 장조림용으로 먹는 거예요? 모양이 네모나게 각져서 썰려있던데.


아! 그거는 지인이 엄마, 사부인이 나 회갑 기념으로 한우세트 보낸 거, 거기 있던 거야.


작년 영희씨 회갑 때 엄마가 선물로 현금과 한우 세트를 보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담 지금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냉동실에 내팽개쳐둔 그 고기를, 그것도 엄마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 고기를 내게 먹으라고 보냈단 말인가. 이렇게 무성의하게 꽝꽝 얼려서?


아, 네. 기분이 팍 상해버린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영희씨의 세계에서, 그녀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맥이 빠진 대답을 내뱉은 나는 이만 이 무의미한 통화를 끝내고 싶어졌다.


이번엔 받았으니 알아서 해먹을게요. 대신 다음부터는 이렇게 안주셨음 해요.


그래 잘 해먹어봐. 주고서 고맙다 소리 들을 줄 알았더니...


감사 인사를 기대했다며 언짢음을 한껏 티 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그리고 그 세계는 영원히 분단된 채로 남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전화를 바꾼 시아버지는 이런 상황이 겸연쩍은 지 나에게 농담을 던지며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아버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손질 못하겠거든 그대로 놔둬! 다음에 내가 올라가서 칼로 먹기 좋-게 썰어줄 테니! 알겠지?


그도 나도 알고 있다. 투척당한 그 고기를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것이고, 아버님에게 고기를 손질해달라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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