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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 LEE Jun 01. 2022

2차 가해 속 피해자의 삶, '한공주'

'알쓸범잡' 시즌2를 보다가, 밀양 집단성폭행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돼서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2차 가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때는 2차 가해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고. 이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부터 가해자들의 학부모, 언론까지 2차 가해자였다. 44명의 가해자 중 공소권 없음으로 처벌을 피한 게 14명, 소년원 송치나 구속 등으로 처리돼 제대로 형법 처벌 받은 사람은 0명. 2차 가해로 피해자를 더욱 힘들게 만든 경찰도 징계 수준에 그쳤다.


천우희 배우의 청룡 여우주연상 수상작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마지막 엔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공주가 처한 현실이 너무 답답하고 외로워서 눈물조차 안 나더니 결국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슬펐다.



어쨌거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피해 사실을 부각시키거나 처벌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사건 이후 피해자의 삶을 담아낸 영화여서 더욱 여운이 남는 것 같다. 공주의 불행한 사정들을 더욱 부각하지도 않고 전학 이후 공주의 학교 생활을 억지로 희망적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사건 이후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공주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잘' 살아간다고 해서 피해자가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스테이플러 찍는 소리만 듣고도 겁에 질린 공주의 표정이나 남자 애들의 목소리만 듣고도 PC방을 뛰쳐나가야 했던, 친구들과도 웃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잊은 듯한 공주의 모습이 피해자들의 삶을 짐작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한강의 한 다리를 지나는 버스의 모습이 천천히 재생되고 공주가 끌고 다니던 캐리어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수영을 왜 그렇게 열심히 배우냐는 물음에, 언젠가 살고 싶어질까 봐 수영을 배운다는 공주의 말이 더욱 슬프게 들린다. 


공주조차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실제 피해자들의 삶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까. 막연히 아프고 힘든 삶일 거라 생각한 나조차도 공주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피해자들은 내 생각보다 더 괴로운 삶을 살아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를 받는 건 전데요, 제가 왜 도망가야 돼요?"


우리 사회는 피해자들을 얼마나 보호해주고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어디서 본 글인데, 한 집안의 공주였던 누구나 '공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더욱 어깨를 무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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