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dsbos Nov 01. 2021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줄리엣들의 춤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지 제공: 골든에이지컴퍼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가면 무도회에서 우연히 서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 줄리엣 캐플렛과 줄리엣 몬테규. 같은 이름을 나눈 것마저 운명인 듯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처음 느껴본 감정에 적응할 틈도 없이 줄리엣 캐플렛이 백작가의 남성에게 청혼을 받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가족의 과보호 아래 자란 줄리엣 캐플렛은 청혼을 수락하고 거절하는 것마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통제 안에 갇혀 사는 자신이 마치 보기 좋은 인형 같다고 느끼는 줄리엣은 새장 밖 삶을 향한 궁금증을 품기 시작한다.


줄리엣 몬테규 역시 삶을 답답해한다. 시원시원한 말씨와 당찬 태도를 가졌지만, 밖에 나가야 할 때면 몸가짐부터 ‘숙녀답게’ 달리 해야 한다. 이런 그에게 파티에서 남자들과 춤을 추는 일은 전혀 재미있지 않다. 한창 사랑이 궁금할 나이인 그의 머릿속은 자신의 마음을 뺏어간 여자와의 미래로 가득차 있지만, 야심차게 그려둔 밑그림을 보여줄 사람이나 그를 응원해줄 사람은 거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어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 줄리엣 캐플렛과 줄리엣 몬테규는 제법 닮았다. 스스로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고 순간에 충실한 것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할 계획을 대범하게 꺼내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세상이 요구하는 '여자다운' 줄리엣과 자기 자신 사이의 괴리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뛰어넘어 진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줄리엣과 줄리엣이 거울을 마주보듯 서로를 찬찬히 들여다볼 때면,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눌러둔 자신을 만나고 있는 것만 같다.



줄리엣을 사랑한 또 다른 사람


줄리엣 캐플렛은 그의 시중을 드는 네릿서와 꼭 자매처럼 가까이 지낸다. 네릿서는 줄리엣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고, 몸단장부터 고민상담까지 모든 것을 도와준다. 이렇듯 서로를 각별히 아끼는 두 사람이지만, 네릿서는 줄리엣이 자기를 완전히 편하게 친구로 여기게끔 놔두지 않는다. 아무리 친언니 같아도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시키며 줄리엣의 마음 한구석을 찔러댄다.


이처럼 좁힐 수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줄리엣 캐플렛과 네릿서는 꿋꿋이 서로를 의지하고 또 지지하며 관계를 이어나간다. 줄리엣 캐플렛이 줄리엣 몬테규와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네릿서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해주고, 두 사람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그러나 줄리엣이 연인과 함께하고자 도피를 결심했을 때, 네릿서는 둘이서 도대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걱정하며 차마 그의 계획을 응원하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아낀 만큼 커다란 좌절을 겪으며 서로를 잃게 된다.


애초부터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지우고 스스로의 경제적 안정을 책임져온 네릿서는 줄리엣에 비해 훨씬 더 차가운 현실 감각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 네릿서에게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줄리엣이 생존 능력을 갖추지도 못한 채 도망길에 나서는 일이 얼마나 위험해보였을까? 줄리엣을 소중히 여기기에 도피만큼은 이전처럼 도울 수 없었다. 네릿서가 매정하고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줄리엣을 부정한 다른 이들과 달리 네릿서는 사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줄리엣을 사랑했던 것이다.



줄리엣을 죽음으로 내몬 것


줄리엣과 줄리엣이 운명적인 끌림으로 강하게 얽히기는 했지만, 과연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사랑과 오해가 낳은 비극이었을까?


두 줄리엣의 세상은 좁디 좁다. 주변에 둔 사람은 가족과 시종이 전부고, 밖에 나가서 사교 생활을 하더라도 착하고 아름다운 어느 집안 아무개의 역할을 하는 데 그쳤을 테다. 딸, 동생, 누나가 아닌 자신의 모습은 오로지 연인만 남아있을 뿐, 두 줄리엣의 삶 어디에도 대인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아를 탐구하고 실현할 기회는 없는 듯하다. 새로운 배움도 도전도 성취도 없는 새장 속에 살다가 만난 사랑이 얼마나 달콤했을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연인 앞에서 만큼은 어떤 역할에도 구애받을 필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가뭄에 단비 같은 사랑인데, 남자와 억지로 혼인할 일 없이 둘이서 행복한 삶을 이어가려고 도피를 결심하자 세상이 등을 돌리고 가족이 등을 돌린다. 좁디 좁은 세상이 무너져내린다. 이제 두 줄리엣의 곁을 지킬 사람은 오직 서로뿐이다. 연인을 제외한 온 세상이 나를 외면한다면, 원래 간절했던 사랑도 한층 더 절박해지는 게 당연하다.


만일 줄리엣의 세상에 다른 것이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누군가의 낭만적인 연인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꿈을 품을 기회가 더 있었다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말고도 삶을 기대하게 만드는 뚜렷한 그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나,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잔뜩 있는 삶이 그에게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삶을 오직 한 사람이 채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과연 연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었을까?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커튼콜


이야기가 되기 전에 흩어진 이야기


사실 줄리엣과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는 수 세기가 흐른 오늘날의 레즈비언이 보기에 공감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여자가 외모 강박을 갖게끔 만드는 사회에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면, 여자에게 외모가 아름답다는 찬사를 쏟아내는 장면을 영 편하게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 말을 듣는 이가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극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절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한들, 여성 억압의 유구한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극의 끝에 다다르면 쓰라린 통증과 함께 이 작품이 필요한 이유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에밀리 디킨슨의 밤>을 떠오르게 한다. 줄리엣과 줄리엣이 죽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전하지 못하게 되자, 두 여자의 서사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버린다. 사랑에 빠진 것은 뭇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줄리엣과 줄리엣이었다고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쳐도,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웃어 넘기면서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 집에 로미오라고 아들이 있었다던데?"



줄리엣들의 춤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결국 가면을 쓰고 귀를 막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기를 멈추고 둘만의 춤을 춘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즐거워보인다. 극을 보는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언젠가는 저기 저 사람들의 가면을 모두 벗기고, 맨얼굴로 열린 귀로 줄리엣과 줄리엣을 마주보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 우리 모두가 아는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줄리엣과 줄리엣의 마지막 춤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듣든, 그 사이를 마음껏 뛰어놀고 우리의 이야기를 할 때, 크나큰 자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럼 줄리엣과 줄리엣의 이야기는 누가 듣냐고? 여기, 우리가 듣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줄리엣들의 경험을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다면, 그래서 줄리엣의 이야기가 세상 어디로 가든 널려있을 만큼 많고 다채로워진다면, 어느덧 가면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줄리엣과 줄리엣>의 모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만큼, 레즈비언 서사를 향한 갈증은 더욱 짙어진다. 아쉬운 점을 느끼는 만큼 이 다음을 더욱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이 심어준 갈증과 기대는 줄리엣들의 춤이 계속될 것을 예고한다. 앞으로 더 많은 줄리엣이 자기 이야기를 써내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찾아나서게 될 것이라고.




* 본 글은 관람권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전지적 레즈비언 시점 Vol.2> 브런치북 발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