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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아트리체 Feb 28. 2023

결혼을 했다, 2번

아니요, 속지 말라고요. 나이만 더 먹은 같은 남자와 한국에서 스몰웨딩

코로나가 풀리고 4년 만에 한국에 가게 됐다. 

우리 뭐 먹지? 

아귀찜,

순대, 

회,

... 


먹을 계획만 잔뜩 세웠다. 알지 못했다. 우리 엄마의 큰 계획을. 


네덜란드에서 온라인으로 간단하게 결혼했으니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고 마치 "커피 한잔 할래?"라고 가볍지만 무심하게 툭 물었고 평소에도 둔감한 나는 덥석 미끼를 물었다. 


시작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우리의 '결혼식' 2탄의 신호탄은 미미하였다. 꾀가 많은 엄마는 차마 입에 '결혼'이라는 단어조차 올리지 않았다. 다만 '점심'이라고 했을 뿐. 우선은 점심을 함께 먹을 '식당' (= 예식장)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부모님은 큰 아량(?)을 베풀어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게 해 주셨다. 4년 만에 한국에 가는 데 한 끼도 놓칠 수 없었던 우리는 정말 소박하게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점 (삼겹살 집, 횟집)을 카카오톡 리스트로 보냈는데 매번 '음식이 맛이 없더라', '깨끗하지가 않더라'라는 부정적인 코멘트가 이어졌고 우리는 현지인의 추천을 믿어보기로 했다. 

잠시 샛길로 빠져 우리 친척들 이야기를 해보자면 엄마는 7남매, 아빠는 5남매로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의 애정을 가깝게 주고받는 사이다. 사는 곳도 차로 20분 이내의 거리라 싸운 날을 제외하고는 번갈아가며 집을 오간다. 즉, 1) 서로 삐치지 않게 모두 초대를 해야 하고 2) 그 숫자만 해도 적게 잡아 40이다. 특히 사촌들 중 나와 동생은 막내라인을 맡고 있어 결혼 한 사촌들의 식솔까지 합하면... 세지 않는 편이 좋겠다. 아무튼, 이 대가족(& 모두 대식가)을 한 식당에 모아 만족할 만큼 먹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기에 평소에도 외식을 자주 하시는 부모님을 믿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50이 되던 해에 주부 공식 은퇴 선언을 하셨다). 


다만, 그 선택이 호텔 그리고 뷔페가 될지는 미처 몰랐다. 

날짜가 가까워지자 엄마는 마치 밥 먹고 양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떻게 새 식구를 소개할 것이냐 물었다. 그래도 식구들을 다 모았는데 뭐라도 한마디 하고 아빠도 축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 잘 노는 동생두면 뭐 하냐 노래라도 시켜서 써먹어라는 둥 애써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래, 그럼 다 같이 오랜만에 모였는데 간단히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어디 사는지나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을 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월척을 올리듯 그럼 엄마가 아는 곳 중에 밥도 맛있고 프레젠테이션 룸도 있는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예약하겠다고 했고 순진한 나는 그곳이 대학 때 MT로 갔던 오리고기 파는 민박 같은 정도로 생각했다 (그곳에 없는 것이 없었다. 노래방기계와 스크린까지). 특히 우리 가족은 스테이크보다 오리고기가 백배는 어울린다. 아무튼.


한국 가기 2주 전, 동생이 연락이 왔다. "누나 화장 어디서 할 건데? 나도 같이하자". 그렇다 우리 동생은 열려있다. 나보다 더 많이 안다. 연예인 하려다가 때리 쳤지만 써먹을 게 많다. 엄마랑 나만 특별하게 기분내고 싶었는데 줄줄이 아빠에 신랑까지 포함시켜 5명이서 메이크업을 받기로 했다. 우린 공평하니까. 


한국 도착하고 이튿날, 그 콘도(?)에 가보기로 했다. 웬걸, 호텔이었다. 들어가는데 입구에 내 이름이 보였다. 시차적응이 안돼 환시인가 했지만 생시였다. 신랑이름도 한글로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이건 빼박이다. 이제 이 '점심'은  결혼, 아니 엄마말로 '스몰' 웨딩이 되어 숨기고 있던 위장을 풀었다. 올 때 아무것도 안 준비하려 했는데 3만 원 주고 온라인에서 흰 원피스 사기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격식따지는 한국인인 것이 다행스럽다. 


결혼식 당일 나는 신부화장이 아니라 그냥 화장을 예약했는데 신부화장이 되었고 신랑은 백인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떡칠당해 하얗다 못해 허옇게 변했다. 제일 멀쩡한 사람은 아빠로 거부하던 손길 위로 뿌려지던 흑채만이 남아있을 뿐 본인의 모습을 지켜냈다. 북적북적 도착한 그 호텔에 들어서자 부모님의 이름으로 화환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신랑과 나는 주눅이 들었다. 하루하루 진화하는 결혼이라니 신선하지만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역시나 사랑하는 이모들을 선두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인사하며 맞이하느라 차마 눈치채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친척인가? 먼 사돈인가? 우리가 사돈을 초대했었나? 하며 어리둥절하는 사이 뷔페룸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앉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총 100명 (나는 그때도 최대 50명 부른 줄 알았다) 예약한 곳에 총 200명이 오는 (불) 상사가 발생했고 호텔에서는 의자를 더 놓기로 했다. 물론 술과 음식도. 그렇다. 우리 엄마 작은 체구와는 다르게 불도저의 성향과 대대장 같은 성격을 지니셨고 모두를 그렇게 몰고 오셨다. 


연기자를 지망했던 동생은 타이틀이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떨린다며 마이크에 대고 고백을 했고 신랑신부 입장을 다행히(?) 무사히 외쳐주었다(그렇다 이건 이제 본격 결혼이다). 입장을 하자마자 동생을 마이크에서 구출시키고 신랑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신랑은 한국말로 3줄 적어가서 한글 발음을 보고 읽었는데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동생은 약속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가 잘하는 노래를 불렀다. 한마디 하라는 엄마의 옆구리 찌름에 아빠는 무대 중간에 가지도 않고 가는 와중에 '와줘서 감사하다'는 외마디를 남기고 무대 옆으로 피신했고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엄마가 그 뒤를 수습을 했다. 


참석객의 평균 연령과 (60세 이상) 나와의 관계를 고려해 (이모의 현남편 = 나의 이모부, 숙모의 남편 = 나의 삼촌) 결혼을 장려하는 부케를 던지지 않고 상품 퀴즈를 진행했다. 졸지만 않았으면 맞출 수 있겠지만 촐싹거리며 퀴즈를 맞혀줄까 고민했었다.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마치 스피드 퀴즈 만 양 하나, 둘, 셋 하기가 무섭게 모두 손을 흔들었고 3개만 준비했던 퀴즈는 도전 골든벨 저리 가라 할 만큼 치열했다. 


총 1시간 정도의 레크리에이션 (?) 프로그램을 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진행하고 퇴장하자마자 베프의 차에 실려 도망갔다. 계속 붙잡혀있었으면 계속 사진 찍히고 있었을 것이며 알고 보니 그곳의 반은 엄빠의 친구, 직장동료들이었으므로 솔직히 나는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랑은 결혼식 내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님, 아버님이 행복해보여서 보는 내내 기뻤다고 했다. 그래 그거면 됐지. 


아무튼 이렇게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보니 우리의 전우애가 더 돈독해졌다. 그래 우리 이것도 해냈는데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 우리 이제 두 번 결혼했으니 서로 힘든 일 있어도 두 번은 봐주자. 

도망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엄마 아빠는 벌써 사진을 확인하고 계셨다. 다만,,

"이게 누고?"

"당신 친구 아이가?"

"아인데? 참말로 당신 친구 아이가?"

이런 대화들이 오갔을 뿐이다. 

 

...


결혼식 다음날, 이탈리아에 계식 시부모님께 '점심' 잘 먹었다고 전화를 드렸다. 사진도 몇 장 보내드렸다. 사진이 너무 이쁘다는 말과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점심' 언제 먹을 거니?'라고 답장이 왔다. 


그렇담 이 결혼식은...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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