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서점에서 무심코
다정은 입꼬리에서 오는 것 같아. 나는 특정한 입꼬리를 좋아해. 입술의 끝이 입안으로 살짝 말려 들어가듯 귀여운 모양새가 있는데 사실 내가 방금 적은 문장이 그 모양을 잘 설명한 것 같지는 않아. 어쨌든 여기서 귀여운 입술 끝이라는 표현이 중요해. 이런 입꼬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곧 올라가서, 그 입매를 한 사람이 다정스럽고 산뜻한 여유를 가진 채 웃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사실 꼭 그 모양의 입매를 하지 않았더라도 상황을 의식해서 싱긋 올라가는 입꼬리라면 내가 말하는 입매의 느낌이 나기도 해. 상황을 모면하려 짓는 억지웃음과는 달라. 결코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내가 말하는 의식적인 웃음은 마뜩잖은 상황 속에서, 당황하고 민망해하는 상대 혹은 그 자신을 감싸 안는 웃음을 뜻해. 예를 들면 사람이 가득 찬 전시장에서 어깨를 부딪힌 상대에게 싱긋 웃어주곤 자기 갈 길을 가는 그런 미소 말야.
왜 이런 얘길 꺼내게 됐냐면 오늘 하루 사람 많은 전시장에서 그 미소를 짓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야. 오늘 저녁 우연히 만난 또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모양 입꼬리를 보았기 때문이야. 하필 이런 날에 밤의 서점에서 다정함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야.
두 가지 이미지와 한 가지 단어가 겹치며 네가 떠올랐지 뭐야. 사실 지금에 와서 너의 입매가 어떠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는 그런 상냥한 미소를 자주 지었어. 그것만큼은 참 확실해. 작은 친절이 작은 미소라는 형태로 몸에 밴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너의 미소를 의식하게 되었으니 다른 건 잊어도 그건 잊을 수가 없게 되었어. 네 버릇 같은 미소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어.
어쩌면 그 미소를 가진 이가 네가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너에게는 그 미소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 어떤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오히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 같을 때. 그래, 나는 사실 너의 그 상냥한 입꼬리에 거창한 의도가 없어서 네가 더 좋았던 걸지도 몰라. 나이 같고 눈높이 같은 사람이 보여주는 한 조각 다정함은 그 시기 내게 얼마나 생경한 빛 같았는지. 그렇게 내 마음 끝자락은 작은 덩굴손이 되어 네 옆모습을 좇았고…. 덩굴손 같은 내 마음 움직임이 운율을 가진다면 그것이 ‘아무도 모르는 노래’이길 바랐던 시간조차 이제는 아픔 없다며 기억 뒤편으로 꼭꼭 챙겨 넣었지. 그렇게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늘 같은 중첩을 맞닥트리는 날이면 너는 단번에 수면 위로 떠올라버려.
상냥한 미소와 다정함이 만나면, 그 입가의 움직임과 이 단어의 발화면 네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는 듯이. 그것이 너에 대한 내 추억을 구성하는 가장 큰 재료라는 듯이. 많이 그리고 그릴수록 전부를 드러내되 도리어 매끄럽고 단순해지는 필선처럼, 너라는 사람 실루엣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둘이라는 듯이.
다정한, 입매. 너는 이 둘로 생생하고 찬란하게 떠올랐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억 속으로 접혀 들어가. 얄궂게도 너는 너를 떠올리게 했던 두 가지 단어로 남아. 기억에서 널 불러오는 너의 특징이 강해질수록 너에 대한 기억은 더 빨리 접히고 납작해져. 마치 시간이 만들어 낸 압화 같아. 기억 속 네가 아름다워질수록 너와 멀어짐을 느껴. 너는 여기 없고 회상에서 벗어나고 나면 그때의 나도 여기 없지. 그래서 추억이라는 사탕을 다 녹여 먹을 때쯤이면 지금처럼 알 수 없는 헛헛함이 들기도 해.
그때의 너도 없고, 그때의 나도 없는 대신 지금 여기에는 지금의 내가 있는데 나는 혼자 잘 있다가도 너를 좋아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면 내 곁에 그때 그 설레임을 불러일으키는, 내 마음을 쏟아붓고 싶은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마는 거야. 추억이란 게 시간이 눌러 만든 압화라면 나는 나와 같이 시간을 아코디언 북처럼 펼쳐 나갈 사람을 필요로 하는 거야. 기왕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페이지를 가진 그런 책처럼. 그 사람과 함께 할 풍경이 계속해서 담길 수 있도록.
그래, 나는 우정보다 무거웠던 그 감정의 기억 위로 피어날 새로운 감정의 역사를 원해. 이제 나는 새로운 다정이 필요해. 더 자란, 나이 먹은 나는 체온이라는 다정을 맘 놓고 나눌 사람이 필요해. …그래도 첫 시작은 다정한 입꼬리겠지.
밤의 서점에 와서 무심코 네 생각을 해 버린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