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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Jun 14. 2023

기억이라는 가구

그래서 너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전 어느 앤티크한 카페에서 중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났다.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켜도 얼음이 담긴 잔과 커피가 담긴 잔을 따로 주어 쟁반에 곱게 담겨 나오던 곳이었다. 얼음도 카페에서 흔히 보는 각얼음 여러 개가 아니라, 무슨 위스키 얼음 같은 크고 둥그런 것을 하나 쓰는, 그 가게만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신경을 많이 쓴 곳 같았다. 벽지와 소품도 예뻐서 폰 카메라를 켜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잘 나왔다.


친구들이 이 카페 분위기를 더러 나와 어울린다고 했다. 실제로 카페 안팎을 꾸미고 있는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나 소품들과도 상통한 터라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름 기뻤다. 어떤 사람의 분위기란 건, 그 사람이 꾸준히 좋아해 온 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또래에게 내가 어떻게 비춰질지 가장 궁금해 하던 시기는 아마 사춘기 때가 아닐까 싶은데, 생각해보면 이 친구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크게 신경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얘네랑 오래 가는지도 모른다. 


커가며 느낀 건, 어른에게는 속 얘기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사실 친구가 많다는 것. 그런데 나는 이 친구들 덕분에 친구가 아주 많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웬만하면 호호 할머니일 때까지 같은 팸이고 싶다.(우리는 우리를 OO중 팸이라고 부른다) 늙어서 서로 의지도 하고. 오래 좋아한 사람들을 더 길게 좋아하며 곁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줄지 너무 궁금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많이 다르니까. 학교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친구가 안 됐을지도 모르는, 신기하고 귀한 인연들이다. 네 명의 정치관이 다 비슷한 것도 아니고, 각자가 매기는 삶에서의 우선순위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 중 두 명은 9 to 6로 일하고 있다면 다른 두 명은 현재 더 유동적인 시간으로 일하고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 한 친구의 의견이 다른 친구들과 많이 다를 때를 인지해도, 우리는 왠지 서로를 포용한다. 


‘그래서…’라고 말하기에 인과관계가 똑바르다고는 못하겠지만 무의식에는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기에 ‘그래서…’ 나는 친구 한 명이 이 무리에서, 심지어 삶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했을 때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애를 붙잡은 순간부터 사안의 중대함에 힘겨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오래된 친구가 사라지고 남겨놓고 간 빈 칸을 내 삶에 들이는 일이 더 고되고 괴로울 것이 뻔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만 말하고 가겠다고 했던 그 사건은 긴 시간 지나고 나면 어떤 자국, 어떤 모양의 나이테로 남아 우리들이 만든 기억의 가구에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조하여 영향을 미칠까. 몰아치는 너울 같은 파도 말고, 어서어서 멈춰 있는 자국이 되기를 바라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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