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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라이언 Apr 12. 2021

이과 출신이 글을 쓴다는 것

나에게 글쓰기는 가장 즐거운 일이자 가장 힘든 일이다


시간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 1992년 가을.


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당시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였던 3학년 형님들과 수능세대를 맞이해야 하는 1, 2학년들이 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1학년 가을은 무척 중요한 시기이다. 바로 2학년부터 문과, 이과로 나눠지기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1학년이 무슨 생각의 깊이가 있다고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결정을 하게 만드는 건지 참 잔인하다.)


당시 문/이과를 결정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적성검사였는데, 당시 내 적성검사 결과는 200% 이과를 나타냈다. 문득 기억이 나눈 것은 이과의 수많은 분야 중에 나한테 제일 맞는 분야가 조선해양 분야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난 실제로 조선소에서 약 1년가량 일했다.) 종이 쪼가리 하나에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 참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사실 적성 검사 결과도 결과였지만 내가 이과를 가야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2가지가 더 있었다. 


첫 번째는 친형의 영향이었다. 나와 3년 터울의 형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겨우 대학에 들어갔다. 형은 문과를 선택했고 머리는 좋았지만 노력을 하지 않았던 탓에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다.('두뇌는 우수하나 산만하고 노력을 게을리한다'.... 고 생활기록부에 적혀있는 전형적인 뺀질이 스타일...) 그 덕분에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의 문은 한정적이었고 나름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방대 회계학과를 들어갔다. 자식들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부모님은 첫째의 실패를 교훈(?) 삼아 나에게 항상 "넌 꼭 이과를 가야 한다. 문과에 가면 대학 가기도 힘들고 먹고살기도 힘들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두 번째 이유는 1학년 담임선생님 때문이다. 1학년 담임선생님은 한문을 가르치는 분이셨는데 30대 초반의 노총각(지금은 뭐 30대 초반이면 파릇파릇한 청춘이지만 당시에는 노총각에 속했다.) 히스테리 때문인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숙제나 복습을 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랑이 몽둥이질을 받아야 했다. (그랬다. 그때만 해도 학교 체벌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학생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분이었기에 문과를 가면 또 한문을 공부해야 하는 탓에 본인의 적성과 무관하게 이과를 선택했던 친구들도 많았다. 참고로 이과를 가게 되면 2학년부터 한문과는 바이바이 였다.


그렇게 이과를 선택했고 2년 간의 고삐리 생활을 충실하게 수행하였고 드디어 대입 수능시험 점수표를 받는 날이 되었다. 점수표를 받아보고 난 정말 내 눈을 의심했다. 당시 수능시험은 언어(국어), 외국어(영어), 수리(수학), 탐구(과학과 사회, 역사, 세계사 등) 4개 영역으로 구분되었는데 언어와 외국어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음에도 나머지 수리와 탐구는 반타작이라는 끔찍한 점수를 받았다.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2년간 이과생으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건만 정작 문과 과목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이과 과목에서는 죽을 쒔던 것이다.


@pixabay


그래도 언어와 외국어에서 취득한 점수 덕분에 난 제법 괜찮은 수도권 공대에 들어갔고 문과생스러운 점수를 받은 수능시험은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평범한 공대생들처럼 복학 후에는 전공수업에 몰두했고 토익점수도 넉넉하게 획득해서 꽤 괜찮은 국내 화학회사에 입사하였다. 하지만 그 회사는 전형적인 군대스타일의 상명하복 조직이었고 매월 실적을 채워야 하는 빡빡한 업무 일정들로 내 몸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3년 만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우연한 계기로 금융 스타트업 회사에 초기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 내가 맨 처음 맡은 업무는 사용자 커뮤니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없던 서비스이기도 했고 플랫폼 비즈니스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관계로 이 서비스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사용자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평소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고 직접 인터넷 카페를 운영했던 이력도 있었기에 무척 즐기면서 일을 시작했다.


@pixabay


이 벤처회사에 입사한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대표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혹시 홍보업무를 맡아보지 않을래?"


대표님은 입사 이전에 형님 동생 사이로 몇 번 뵌 적이 있어서 회사에서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말씀을 하시는데 이 날의 제안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 공대를 나왔고 기자를 상대해야 하는 홍보 업무는 둘째치고 보도자료도 한 번 작성해 본 적이 없는 완전 초짜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제 회사의 서비스가 비교적 안정적인 단계로 구축이 되는 상황에 좀 더 사용자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본격적인 홍보활동이 중요할 시기였기에 더더욱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그냥 홍보 전문가를 한 명 채용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대표님께 제안을 드렸더니 대표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셨다.


"아무리 유능한 홍보 전문가라고 해도 우리 서비스를 빠른 시간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넌 초기에 합류해서 그 누구보다 이 서비스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우리 서비스를 많은 사람들한테 홍보하는 데 있어 유능한 홍보 스킬보다는 서비스 본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족한 스킬은 단시간에 배워 나갈 수 있지만 서비스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거든"


날 위한 격려였는지, 아니면 빨리 홍보 담당자를 확보해야 해서 이런 말로 나에게 사기를 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홍보담당자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홍보에 대한 책도 많이 보았고 무엇보다 보도자료를 쓰고 배포하는 것에 대해서도 참 많이 공부했던 것 같다. 처음 보도자료를 배포하던 날 기자님들께 무턱대고 전화했다가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기도 했고 홍보담당자와 기자 사이의 에티켓도 잘 몰라서 실수한 적도 많았다.


그렇게 6개월가량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처음으로 내가 배포한 보도자료가 네이버 메인에 노출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후 일간지 1면 기사를 비롯해 공중파 뉴스에 까지 회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사 및 방송 이후 급증하는 사용자 데이터를 목격하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큰 기쁨이었다.


@pixabay


홍보일을 시작으로 난 그 이후부터는 회사를 대표해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아졌다. 서비스 페이지에 들어가는 문구를 정리하는 것부터 회사 공식 블로그 운영, 그리고 가끔은 대표님께 청탁된 언론 기고문도 내가 대필해서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난 회사일의 대부분을 글을 쓰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장 재밌어하는 일을 꼽으라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가장 힘든 일을 꼽으라고 하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재밌는 일임에도 대부분의 글쓰기가 회사를 대표해서 작성한 것이기에 혹시 잘못 표현된 글로 인해 회사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무척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부담감을 갖고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런 부담감을 버리고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브런치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과를 선택했던 내 결정이 잘 한 결정인지 아닌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잘못한 선택에 대해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내 마음이 끌리는 것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렇게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아 보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내가 제일 즐거워하는 일이면서도 가장 힘든 일이다. T.T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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