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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늘 Oct 13. 2022

10년을 함께 라면

  요즘엔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게 날씨로 느껴진다. 더운 날도 있지만 바람이 부는 날이 많아졌고 해가 잠시라도 구름 뒤로 숨으면 쌀쌀함이 피부로 확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라면이 생각난다. 그날도 라면을 사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큰 고민 없이 너구리나 스낵면을 사러 갔겠지만 라면 코너에서 반가운 인연을 발견했다.


  '틈새라면이라니, 이게 얼마만이야.'


  계떡(순한맛)도 아닌 빨계떡(매운맛) 봉지라면이어서 잠깐 고민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인연을 무시할 수 없어 냉큼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와서 어떻게 하면 이 라면을 잘 끓여먹을 수 있을까 하여 검색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라면 안에 콩나물과 계란을 넣었다. 역시 틈새라면은 콩나물과 계란이지, 하며 다시 나가서 콩나물과 계란을 사 가지고 왔다. 평소라면 한 번 나갈 때 모든 일을 다 해치우지, 두 번은 잘 나가지 않지만 그날은 틈새라면을 맛있게 먹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졌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이 모든 기행은 나와 이 라면 사이에 있는 단단한 끈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큰 학원가가 있었고, 나는 초중고 학창 시절을 학원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특히 중학생 때는 어쩌다 보니 과학고 준비반에 들어가게 되면서 집, 학교보다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말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이때 나는 학원을 놀러 다니던 학생이었다. 수업 내용은 공부를 안 하니 하나도 모르고 넘어가지만 친구랑 있는 그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수업 중에는 점심, 저녁 시간이 항상 있었는데 이때 우리는 학원가에 있는 식당을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 거의 매일 가다시피 했던 곳은 틈새라면 식당이었다.


  학원들 사이로 나 있는 골목의 한 틈새에 위치한 이 식당은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이다. 식당에는 15명 정도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이곳에 사람이 가득 차면 그 열기로 바깥 창문에 김이 자욱하곤 했다. 우리 때만 해도 학원 식사 시간만 되면 우리처럼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학생들이 가득 차 바글바글 했는데,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감사하게도 그중에서 나랑 내 친구를 기억하셨다. (다시 생각하면 매일같이 오고 그렇게 키와 식성이 많이 차이나는 여자애 두 명을 기억 못 하기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 내 친구는 그때도 키가 167이었는데 나는 150 초반이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순한 계떡을 시켰는데 친구는 빨계떡 중에서도 가장 매운맛으로 시켰다.)


  아저씨는 과묵하게 챙겨주시고 아주머니는 항상 살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는데 가끔은 주먹밥이나 찬밥 같은 서비스를 주셨다. 사장님과 사모님이랑은 친하지, 라면이니깐 다른 음식보다 더더욱 맛있지, 시간 내에 빨리 먹을 수 있지, 이런 여러 이유들로 우리는 그 집에 자주 갔고 돈이 넉넉한 날이면 우리 돈으로 김가루 주먹밥과 스팸 주먹밥을 사 먹는 게 낙이었다.


  중학생 때 약 2년간은 이렇게 매일 갔었다. 그러다가 내 성적이 떨어지고 엄마가 화가 나셔서 멀리 주상복합 안에 위치한 학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이 생활이 끝이 났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이 친구랑 또다시 학원을 같이 다녔고 이제는 주말에 열심히 공부하면서 틈새라면에 가끔만 방문했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우리를 바로 알아보시곤 반겨주셨다. 우리 둘 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우리가 다녔던 학원에서 조교 알바를 하느라 학원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도 아주 가끔 틈새라면에 들렸는데, 안경을 벗은 친구를 보고 살짝 헷갈려하셨지만 우리를 기억해주셨다.


  올해 봄, 나에게 이 직업에 대한 생각을 뒤흔들만한 많은 일들이 학교에 있었다.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상해 치료를 받던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틈새라면 생각이 났다.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면서 고작 라면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 가게에서 친구랑 같이 라면을 먹고 싶어졌다. 친구가 시간이 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고맙게도 바로 나와줬다. 지금 서로가 사는 집과 가게와는 거리가 꽤 멀어졌는데 우리 모두는 그 라면을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간 지가 5년보다 더 전이어서 그런지, 우리 둘 다 사회에 찌든 몰골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장님과 사모님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듯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우리 둘 다 신기해하며 점잖게 라면과 주먹밥을 시켰고 작은 목소리로 말할까, 말까를 의논했다. 그러다 친구가 계산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그제야 사모님께서 마스크를 벗으니 알겠다고 하시며 반겨주셨다. 정말 기억하신 것일지, 예의상 하신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여전히 그 자리에 가게가 있고, 사모님과 사장님께서 건강하게 계시고, 또 이렇게 추억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시울이 약간 붉어질 정도로 나에게 위로가 된다.


  시간이 나질 않아서 지금 바로는 갈 수 없으니 라면이라도 가게와 비슷한 맛으로 끓이고 싶어졌다. 사장님께서는 항상 콩나물과 계란을 넣어서 라면을 끓여주셨기 때문에 나도 콩나물 손질하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아가며 라면을 끓였다. 최대한 비슷해 보이는 레시피를 찾아서 만들었지만 평소에 요리를 잘 안 해 먹는 사람의 손으로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이날 내가 끓인 라면에서 추억의 맛은 확실히 났고, 다 먹고 친구에게 라면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나 틈새라면 끓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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