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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팔분의 일 토막 났습니다

죽으란 법은 없다

by 모모제인


평수는 절반인데
왜 그보다 더 좁은 것 같지?


48평에서 24평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이 바닥을 빼곡히 채우고도 침대 위, 책상 위까지 들어찼는데도 박스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상하다. 분명 이사하기 전에 선반, 서랍 할 것 없이 짐을 줄여서 빈 공간을 절반 이상 만들었고, 산술적으로는 집의 부피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이게 다 들어가야 맞다. 조금 빠듯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바닥에 깔린 짐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우리는 밥그릇 하나 올리기 힘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여기서 살 수 있을까?


48평 집에서 넓게 펼쳐져 있던 살림은 켜켜이 천장을 뚫을 듯한 기세로 높이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모든 수납장들은 가구 지붕과 천정 사이까지 N단씩 높아졌다. 식기건조대는 싱크볼과 선반 사이로 공중부양 되었다. 냉장고 문을 열기 위해선 식탁에서 일어나야만 했고, 세탁기 문을 열기 위해선 세탁기 앞 물건들을 치워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결론은 이랬다.


바닥면이 2배 줄면
실 사용공간은 8배 줄어든다.


산술적으로는 집의 부피가 2배 줄어드는 게 맞다. 천정고는 그대로이니 (가로*세로*높이), 부피공식으로는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침대, 소파, 식탁, 책상 등 물건을 쌓아 올릴 수 없는 기본생활공간을 감안하면 3차원적 체감상 훨씬 좁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집 가구는 대체로 높이는 낮고 면적은 크다. 자주 쓰지는 않지만 필요한 물건들, 예를 들면 캠핑용품, 부피 큰 구명조끼 등 수영용품, 지금 입기엔 크지만 내년에 물려 입으려고 남겨둔 아이들 옷, 아이들은 안 보지만 부모욕심에 사둔 학습용 전집들, 못 버리는 이유는 그대로인데 버려야 하는 것들이 생겼다.


엄마,
아빠의 눈물은 귀하다고 하던데 맞아?


짐 정리를 하다 잠든 사이에 아이들 아빠가 눈물을 보인 모양이다. 결혼생활 15년 동안 남편의 눈물을 본 건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유일하다. 더 좋은 생활환경을 위해 큰 결정을 하고 왔는데 아이들까지 울적해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엄마, 집에 가기 싫어


며칠 후, 급한 예방접종과 아이 치과 치료를 위해 집을 나섰다. 예약을 해야 하나? 하고 근처 병원 리스트를 찾다가 깜짝 놀랐다. 도보 5분 거리에 소아청소년과가 무려 7곳, 치과가 5곳이었다. 이사 전엔 갈만한 소아과가 한 곳밖에 없어서 내원 전날 밤 12시까지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다가 (우리 집 취침시간은 9시 반이다...) 1분 만에 마감되는 예약 사수를 위해 광클릭을 해왔다.


괜찮아 보이는 곳에 갔더니 "대기인원 0명".


진료 보고 나오니 바로 1층에 파리바게트가 보여 빵을 한 조각 먹는다. (예전엔 가장 가까운 빵집이 차로 7분 거리)


당근 한 착불택배를 바로 옆 편의점에 접수한다. (예전엔 집 앞 편의점엔 택배 취급을 안 하고 거점편의점까지 가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당근 올려놓아도 거래가 안돼서 착불택배 보낼 일조차 없었으니 괜찮았다는 게 함정....)


아이들 용돈으로 억만장자처럼 쇼핑할 수 있는 다이소에 홀리듯 들어간다. (예전엔 차로 25분 거리..)


이쯤 되니 아이들은 집에 가기 싫다고 난리다. 슬세권 신문물에 단단히 홀린 듯하다. 아이들 10년 평생 이런 경험도 처음일 테니..


인구감소는
서울 부동산에 가장 큰 호재다


라디오에서 들은 부동산 전문가의 말이 뇌리에 훅 박혔다. 도시철도가 촘촘하고 슬세권으로 온갖 편의를 누릴 수 있는 서울 중심부는 요즘 같은 인구 감소 시대에 더욱 확실한 부동산 투자처란다. 8년 전 성남에서 이천으로 내려갈 당시만 해도 상급지로의 이사는 고려대상조차 아니었다. 그저 출퇴근 편하고 넓고 쾌적한 인테리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천추의 한이지만.


이 비좁은 집에서, 숨만 쉬어도 대출이자를 월 몇 십만 원씩 내며 얼마나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교통, 인프라, 학군 같은 조건이 과연 이를 감당할 만큼의 가치인지 확신할 수도 없다. 또한 이사하면서 드는 생각은 11톤의 살림이 과연 정말 필요했나, 하는 거다.


이사 첫날, 아이들은 동생네 집으로 보내고, 고장 난 보일러로 냉기 가득한 집 한켠에서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흘렀다. 급기야 남편마저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곧 이사한 지 2주가 된다. 벌써 이 공간에 적응이 되어간다. 집에 놀러 온 동생이 몇 년 산 것처럼 친근하단다. 그렇다. 막상 정리하고 보니, 아담하지만 정겨운 공간으로 변신했다. 내 방은 사라졌지만 거실한켠 아지트와 요가매트 깔 공간도 만들었다.


그래, 어딜 가도 죽으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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