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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GUM Oct 26. 2023

삼일문고에서 수업준비

week 2. 서글서글




김광일


구미 산동고등학교 국어교사.

어느 국어 교사가 그렇듯 

책과 글을 사랑한다. 










  가르쳤던 제자한테서 카톡이 왔어요.

  "쌤, 혹시 잡지에 글 실으실래요?"


  저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입니다. 한 몇 년 동안 글 쓰는 수업을 해왔는데, 수업 들은 학생 중 졸업 이후에도 연락하는 친구가 있어요.

  '뭐라고 거절하나…?' 바쁘거든요. 이제 겨우 시험 출제를 마쳤는데, 수행평가 채점해야지. 생기부 자료 만들어야지. 할 게 산더미예요. 명색이 글쓰기 가르치는 교산데, 바쁘다고 대충 써서 줬다가 제자가 선생님 글이 별로라고 느끼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이리저리 거절할 핑계를 찾는 중 카톡 메시지는 이어집니다.

  "구미에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모을 건데 삼일 문고에 관해서 써 주시지 않으실래요? 쌤이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하셨잖아요. 좋아하게 된 계기와 있었던 이야기를 알고 싶어요."

  내가 그런 얘기를 했었나?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요즘엔 수업 내용 이외 말할 내용을 특별히 준비해서 하지 않거든요. 그냥 평소 생각하는 걸 말해요. 삼일문고, 제가 평소 좋아하는 곳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비법을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고 하죠? 삼일문고에 가면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글쓰기 모임도 종종 있으니 글을 많이 쓸 수 있고, 작가 북토크에서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며 글을 썼는지 좋은 생각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 듣는 친구들한테 추천했을 만해요. 하지만 제가 보통 삼일문고에 몇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하거든요. 책을 거기서만 사는 것도 아니고요. 삼일문고에서 하는 북토크나 모임 같은 것도 두세 번밖에 안 가봤어요. "나 삼일문고 글 쓸 만큼 특별한 연은 없는ㄷ.." 라고 답장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습니다.


  글쓰기 수업할 때, 가르친 게 있습니다. 꼭 거창한 이야기로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만 하면 그 자체로서 특별하다. 다른 사람이 읽을만한 글이 된다. 항상 자기가 했던 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옥죄는 법입니다. 스스로 마음에 찔려서 답장하는 걸 좀 미뤄뒀다가 학교 시험 기간이 다가왔어요. 감독하면서 삼일문고에서 나는 어떤 일들을 겪었나 생각을 떠올려 봤습니다. 시험 감독할 땐 생각밖에 할 게 없거든요. 요즘 시험 문제나 생기부 같은 일 관련 글만 쓰다가 색다른 걸 떠올리니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거기 제일 많이 갔던 때는 2019년 겨울입니다. 교육부 파견 근무를 마치고 학교로, 교사로 돌아오기로 했어요. 교육부에서 행정 업무에 많이 치이다 보니 학생들과 수업하는 게 무척 그리웠습니다. 학생들이 뭔가 깨달았을 때 보이는 기쁨의 눈빛이 있거든요? 그걸 다시 보고 싶었어요.


  새 학기 '고전 읽기' 수업을 맡아 하기로 했습니다. 이게 새로 생긴 국어 선택 과목인데 조금 특이합니다. 정해진 교과서가 없어요. 교육과정 내용을 가르치기 위해 어떤 고전(옛날 작품이 아니고 클래식 혹은 명저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텍스트든 교사 마음대로 정해서 수업하면 되는 과목이에요. 오랜만의 수업에 저는 의욕으로 불탔습니다. 어차피 재량껏 하라는 수업, 저만의 수업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점을 찾아 수업할 텍스트를 골랐습니다. 도서관에서 고를 수도 있지만, 서점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좋은 책은 바로 구입할 수 있으니까요. 교육과정별로 어떤 텍스트로 수업을 할지 정하려면 다양한 책을 봐야 해요. 삼일문고는 구미에서 제일 책이 많은 서점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출근하듯 들러 책을 찾아봤어요.

삼일문고는 책을 읽으며 오랜 시간 머무르기 편안하게 공간이 조성되어 있어서 좋아요. 책 진열장 앞에서 서서 읽다가, 지하로 내려가서 편한 의자에 앉아서 읽기도 하죠. 요즘 가보니 카페 쪽 공간까지 틔워놓아 테이블에 앉아서 읽을 수도 있더라구요.


  2주 정도 책을 찾고, 읽고, 수업하기로 한 책은 구입도 해가면서, 교육과정별로 수업할 고전 텍스트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고전읽기의 중요성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 서문으로 하고, 바람직한 삶에 대한 탐구와 인성 함양은 격몽요결의 '입지와 혁구습' 장으로, 고전의 서술 방식을 활용하는 교육과정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비교 열전 형식으로 인물평을 써보게 하자는 식의 계획입니다. 삼일문고 들어간 방향에서 볼 때 왼쪽에 철학, 사회, 역사 같은 인문학 코너가 몰려 있습니다. 거기 책들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고민은 "'한 학기 한 권 읽기' 텍스트를 어떤 책으로 할까?"였어요. 앞서 예를 들었던 교육과정별 텍스트는 책의 부분을 가지고 수업하는 거였는데, 한 학기에 한 권 정도는 책 전체를 읽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특히 소설 같은 경우 스토리 전체를 읽어야 의미가 완성되잖아요? 


  모든 학생이 똑같은 책을 읽게 하는 것보다는, 난이도 별로 세 가지 정도 작품을 정해 학생들이 고를 수 있게 하기로 했습니다. 두 가지 작품은 쉽게 선택했습니다. '데미안'과 '어린 왕자'로요. 저는 '데미안'을 대학생 때 읽었는데,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어요. 청소년기의 학생들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돕기에 딱 적절한 책이죠. 작품 속 표현을 빌리자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책이랄까요. '어린 왕자'는 적은 분량이고 읽기 쉬워서 학업에 전혀 뜻이 없는 학생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일단 재미있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성숙해지는 정도에 따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는 신비한 책입니다. 


  두 작품 선택은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난이도가 높으면서, 학생들이 생각할 것도 많은 소설이 한 권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작품은 잘 안 떠올랐어요. 


  인문학 코너에서 더 들어가 왼쪽 모퉁이, 교육 코너 맞은편에 보면 테이블 위 노트가 있습니다. 저는 서점 방문하면 거기에서 꼭 한 번씩 아무 중간 페이지를 펼쳐 봅니다. 서점을 방문한 사람들이 다양한 책에서 좋은 구절을 노트에 필사해 놓았는데, 펼친 페이지에서 우연히 나온 문구가 나한테 영감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마치 포춘 쿠키에서 문구를 뽑는 것처럼요. 시중에도 아무런 페이지나 펴보도록 해서 도움을 주는 책이 나와 있던데, 이 필사 노트는 그런 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하게 마음에 와닿아요.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 속에서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부분을 써둔 걸 텐데, 저는 그 구절을 내 상황 속에서 내 식대로 해석하는 거죠. 우연과 인연이 엮여 나한테 길을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한 권 읽기 마지막 작품을 고민하고 있던 날 노트를 펼쳐서 만난 문구는 이거였어요.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머물러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 윌리엄 쉐드


그때 찍어뒀던 문구 사진입니다.


  윌리엄 쉐드는 신학자입니다. 문구를 노트에 쓴 사람은 영적 실천을 다짐하며 썼던 걸까요? 저는 이 구절을 읽고 학생들한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라고 생각했어요. 평소에도 학생들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요즘 학생들은 도전보다는 안정 지향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아서요. 이렇게 쓰니 ‘요즘 것들은’ 하는 꼰대 같은 느낌인데, 사실 안정 지향적인 건 저도 마찬가지. 현대인의 성향이 대부분 그런 것 같습니다.

 

  두려움 없이 세상에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책을 읽히겠다고 방향을 잡고 나니, 답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점 필사 코너에서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명사가 사랑한 책 100’이라는 코너가 있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처럼 우리 시대의 학자 작가 예술인 등이 추천한 책을 많이 추천받은 순서로 모아놓은 곳입니다. 거기 1위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맞다. 그리스인 조르바!'

  두려움 없이 세상에 뛰어드는 사람이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는지 조르바를 통해서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데미안에 비해 분량도 좀 더 많아 읽기 난이도도 높으니 제 계획에 딱 들어맞았죠. 이전에는 이 코너를 보면서도 왜 ‘그리스인 조르바’를 대안으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사람은 생각의 방향을 돌리지 않으면 바로 옆에 답을 두고도 못 찾는 것 같습니다.



  그 해 수업하며 참 재미있었습니다. 2학년 9반에서 수업한 게 특히 기억에 남아요. 유쾌했던 반이지만 공부 쪽으로 뛰어난 반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읽고 쓰고 토론하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대견했지요. 서영이, 승효, 영이 모습이 떠오르네요. 잘들 지내는지 그립습니다. 


  승효였던 것 같아요. 책을 읽는 과정에서 조르바의 야만적인? 문란한? 행동이 싫다고, 비판적인 내용의 독서 일지를 계속해서 썼어요. “이걸 왜 읽는지 모르겠다. 읽기 힘들다.”라고까지 했습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특히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모습들도 많이 나오니까요. 


  ‘책을 잘못 골랐나? 어떤 조언을 해줘야 책의 의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승효에게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은 책이라고 한다고 해서 억지로 너도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다만, 오래된 책이니 시대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고려하면서 작가가 어떤 의도로 뭘 표현하려고 한 건지에 집중하여 읽어보라고 했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승효가 쓴 에세이에는 조르바가 어떤 자유의 모습을 표상하는지,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읽는지를 깨달았고, 자신또한 그 자유를 추구하게 됐다고 했더라구요.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독서가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실제 교원평가 내용. 보람차다.


  고전 읽기 수업했던 해 교원 평가입니다. 내용들이 좀 괜찮죠? 열심히 준비한걸 아이들도 느꼈는지, 다른 해보다도 더 제 수업을 좋아해 줬던 것 같습니다. 수업에 대한 기록이 하나 더 있어요. 수행평가 채점하며 학생들이 책을 참 잘 읽었다고 느껴 감동했어요. 인스타그램에 활동지 사진과 글을 남겨 뒀었습니다.


그해 활동했던 사진들.


  활동지 사진들과 함께, '고전 읽기 수행평가 채점 끝. 내가 가르치기엔 이미 나보다 뛰어난 애들이 많다. 나는 과연 얘들만큼 치열하게 읽었나?'라고 써놓았어요. 필요한 조건만 채워도 점수를 준다고 했는데, 빽빽하게 자기 생각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다양한 활동 결과들을 내놓았습니다. 무엇보다 표현해 놓은 생각의 깊이가 깊어서 감동했던 것 같아요. 저도 학생들에게 자극받아서 수업했던 책들을 한 번씩 더 읽었습니다.


  특히 ‘그리스인 조르바’는 제 인생의 작품이 됐습니다. 작년에 그리스 여행을 다녀왔는데(그리스를 가게 된 것에 ‘그리스인 조르바’도 영향을 크게 끼쳤지만, 삼일문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여행 코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의 그리스 여행기를 읽었던 것이 영향이 컸습니다. 거기도 조르바 얘기가 나오죠.)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타투를 하나 새겼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으로.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나도 학생들에게 주려고 했던 메시지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다짐을 남기려고 한 건데, 지금 제가 그 다짐대로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맨날 바쁘다고 힘들다고 투덜대고. 거울 제 모습에서 말린 동태 눈깔같이 흐릿한 눈빛이 보입니다. 그나마 이 글을 쓰면서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구요.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써놓고 보니, 삼일문고 이야기를 쓴다고 썼는데, 수업 수기인지 서점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글이 됐네요. 삼일문고를 배경으로 한 제 이야기를 써주면 된다고 했으니 이 정도 쓰면 괜찮겠죠?



  어쨌든 결론, 저는 삼일문고와 함께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소소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잘 지내고 있답니다. 삼일문고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 같아서 멋지구요.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습이 되더라도 제게는 마음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좋은 서점으로 곁에 오랫동안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 구미 산동고등학교 국어교사 김광일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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