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보통이 아닌, 결코 특별한 존재
빈센트 반 고흐의 존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라는 존재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때는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사실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아, 어쩌면 유치원생 때부터 고흐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고흐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존재는 매우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고흐를 알게 되었을까?
가장 큰 가능성은 교육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읽은 위인전에서 아니면 미술 시간에서 고흐란 존재에 대해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위인전 아니면 교육에서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 존재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회가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흐의 존재는 사회구성원들을 일깨워줄만한 가치가 있어 사회가 고흐의 존재를 계속하여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고흐가 어떠한 존재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흐의 존재를 알게 될 정도로, 왜 사회는 고흐의 존재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사실 오래 전부터 고흐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특히 최근 더 어지러워진 세상 속에서 살며, 그 욕구가 더욱 커졌다. 내 가슴 속에 오래 전부터 반 고흐에 대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러빙 빈센트’를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미술, 그리고 존재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겠다.
반 고흐, 어떤 사람인가?
고흐의 삶을 말하기에 앞서 영화 ‘러빙 빈센트’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러빙 빈센트’의 내용은 고흐가 죽은 후 아르망 룰랭이 고흐의 마지막 편지를 테오에게 전달해주는 과정에서, 고흐의 죽음의 이유를 그의 삶을 통해 추적해보는 로드무비 영화이다. 영화의 모든 인물들은 모두 고흐의 실제 그림 속 인물들이며, 당연히 가상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제 고흐의 삶을 영화의 흐름에 맞추어 살펴보자.
영화는 고흐가 죽은 1년 후, 가상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흐의 친구였던 우체부 조셉 룰랭이, 고흐의 죽음 이후 발견한 그의 편지를 그의 동생 테오에게 전달해달라고 자신의 아들 아르망 룰랭에게 부탁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이 부탁과정에서, 고흐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조셉이 생각하는 고흐는 강인한 사람이며, 그의 정신상태는 정상이었고, 이에 그의 자살까지 의심을 갖는다. 그러나 아르망은 고흐는 그저 약해빠진 사람이며, 따라서 그의 자살이 별로 놀랍지 않다 여긴다. 이런 고흐의 각기 다른 평가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계속 등장한다. 누군가는 고흐를 악마였다고, 누군가는 착하고 조용한 분이라고 평가한다. 고흐에 대한 평가는 더 나아가 고흐의 죽음까지 이른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맞다, 그는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타살이다 등으로 말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누군가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고흐의 삶과 자살이란 그 끝을 보면 아르망의 의견에 더 공감할 것이다. 고흐는 정신적 문제가 있는 환자였고, 그 환자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슬프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병과 자살이란 죽음만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금 더 그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이 사실만으로 고흐가 평가 되었다면, 왜 고흐의 삶을 이토록 강조하겠는가? 이는 요즘 현실 사회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평가하니 진실이 왜곡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경각하며, 고흐의 삶에 대해 더 알아보자.
불행이란 어둠 속 고흐의 삶
주인공 아르망 룰랭은 편지의 전달을 위해, 먼저 고흐의 파리 시절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탕기 영감을 찾아가게 되고, 여기서 고흐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듣게 된다. 고흐의 전반적인 삶을 요약하자면, ‘불행’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네덜란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센트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의 이름인데, 이 때문에 그는 형의 인생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고흐는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그는 큰아버지의 화랑에서 일을 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목사 시험을 준비하지만 합격하지 못하고 전도사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잘 풀리지 않았다. 정신적인 상태 등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는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고 이후 미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화가로서의 고흐의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해 주인공 아르망 룰랭은 가셰 박사를 만나는 과정 속에서 알게 된다. 사실 화가로서의 고흐는 현재 너무나 유명하다. 세계는 고흐를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고흐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반대였다. 고흐의 위대함은 고흐 자신만 알았고, 세계는 몰랐다. 고흐가 평생 단 한 점에 그림만을 팔았다는 사실은 이를 너무나 뼈아프게 보여준다. 그의 화가로서의 존재는 특별함은커녕 보통의 존재로조차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꿈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부정당할 때 그 아픔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의 서투름으로 인해 의지하던 고갱이 떠나게 되고 가장 큰 버팀목인 동생 테오와도 갈등이 생긴다. 아무도 사려하지 않는 그림으로 가득 찬 방 속에서 그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외로움’ 뿐이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자살이란 죽음은 어색하지 않다.
고흐로서 살아간다는 것
하지만 고흐가 보여준 삶의 방식 측면에서, 그의 죽음을 본다면 어색할 수 있다. 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도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한다.”
-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882.10 고흐의 편지 중
“그래도, 더 나은 변화가 온다면, 나는 그걸 얻은 것으로 생각할 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드디어, 그래, 결국에는 뭔가 되고야 마는구나!“
-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879.10 고흐의 편지 중
고흐는 어둠 속에서 결코 빛을 잃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끊임없이 찾고 노력했다. 이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추구하는 가치 역시 뚜렷했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 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 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진지하게 작업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자>, 1882.07 고흐의 편지 중
지독한 외로움, 관계들 속의 의심, 끝없는 고뇌, 후회 속에서 유일한 빛은 ‘예술’이었던 것이다. 이런 화가로서 추구하는 가치를 통해, 우리는 그의 죽음에 관한 의문에 대해 한 가지 답을 할 수 있다. 비록 그는 삶을 포기했지만, 절대 그림이란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노력으로 탄생한 고흐의 작품은,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었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면, 단순히 정물화로써 사물을 그대로 그린 것을 넘어 그림을 그렸을 당시 고흐의 내면의 감정이 화폭에 담겨져 있다. 강렬한 색감과 임파스토 기법을 통해, 고흐의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로 이 그림은 고갱을 위해 아를의 노란 집을 꾸밀 때 그가 그렸던 작품 중 하나로, 고갱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기쁜 고흐의 내적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고흐의 그림들은 그를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로 만들었다. 그리고 고흐 이후 화가들은 자신들의 살아있는 정신, 즉 내면을 그림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빈센트에게, 사랑하는 빈센트가
지금까지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미술을 통해, 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존재는 특별하다. 사회가 그를 위인으로 삼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는 그 사실을 모른다. 자신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 이제 사회도 그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길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고흐는 빛을 잃지 않았다. 이에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절대 못나지도, 평범하지도 않다. 우리는 결코 특별한 존재이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고흐를 현대의 미술관으로 데려와 그가 현대에서 사랑받고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고흐가 감격에 받쳐 울 때 나 또한 계속 눈물이 나온다. 고흐가 어둠 속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존재를 끊임없이 의심받을 때, 그에게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고흐에게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느낀 현대 사회는, 혐오의 세상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서투름으로 인해 실수를 하게 되면, 끝이 없는 비판을 넘어 혐오라는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점점 더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힘든 세상 속,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잃기 싫어, 남을 깎아내리면서 이를 지키려한다. 이런 세상 속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그림을 통해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우린 모두 고흐와 똑같음을, 모두 특별한 존재임을 말이다. 다만 지금 당장의 고난과 실패로 인해, 세상이 나의 특별함을 몰라준다 해도,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또 남을 혐오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하기 보다는, 늦기 전에 서로 위로해주고 사랑해주자. 절대 삶이 꺾이지 않기를, 결코 너의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특별하다는 것을 말이다. 너의 사랑하는 빈센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