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잡아 어딘가에 모아놓을 수 있다면
요즘에는 노트북에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심리학 저작집을 베끼는데 하루에 2시간가량을 할애하는 것 같다.
필사에 나름 진심이다. 어쩌면 나에게 필사는, 내용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떤 형태의 명상 같은 의미인 것 같다. 뭐가 풀리지 않을 때, 심심할 때, 하루를 시작할 때, 하루를 마감할 시간이 다가올 때, 손으로 때로는 컴퓨터로 필사를 한다.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고 이쪽 봤다 저쪽 봤다 하는데, 보통 왼쪽에 책을 두고 한참을 베껴 쓰다 보면
오른쪽 목이 되게 아프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독서대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한참 뒤 왼쪽 목이 되게 아프다. 양쪽 목이 공평하게 아팠으니, 혹사당한 오른, 왼 목 근육이 나에게 항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솔로몬급이군, 하고 나를 칭찬한다.
나는 손글씨체가 별로 좋지 않다. 급한 마음을 대변하듯, 쓰다 보면 마구 흘려져서 한참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내 글씨를 읽으려면 사랑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내가 손글씨로 필사를 한다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베끼는 심정으로 수도하듯 쓰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보통 그럴 때에는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획과 선을 예쁘게 그리는 행위에 심취하고는 한다. 그래서 요즘 내용을 보고 싶은 책, 그러나 눈으로 읽기에는 눈이 휙 지나가는 속도에 뇌력이 따라오지 못하는 책을 노트북에 필사하는 것이다.
오늘은 융 기본 저작집 1권을 베끼기 시작했다. 이전에 읽기 시작해 백여 페이지를 분명 읽었는데, 열심히 손이 움직이는 만큼씩 눈에 단어들을 담으니, 새로 읽는 책처럼 내용이 새록새록 새롭다. 쉼표에서, 심장이 찌릿하게 공감이 가는 대목에서 블랙진을 해 하이라이트를 하며, 문단이 바뀌는 곳에서 멈춰 생각을 한다.
이번에는 손의 속도가 너무 느려 머릿속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거미줄처럼 얽힌다. 내용을 이해해가며 드는 생각도 물론 있지만, 난데없는 지나간 과거의 분노했던 사건이나, 오늘 가방이 툭 떨어지면서 가방 주머니 깊숙한 곳에 들어있던 1년여를 찾아 해 메이던 귀걸이를 찾은 행운이나, 책의 내용이 요즘 주로 하는 생각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난데없이 찾아오는 아이디어까지. 거미줄이 꽤 촘촘하다.
아깝다. 다 낚아채어 와서 저장해놓았다가 해리포터 이야기에 덤블도어 교수님이 쓰시는 팬시브 같은 곳에 이 기억들을 주르륵 다 쏟아 놓는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거미줄은 위가 전하는 쓰린 배고픔에 휙휙 저어져 온데간데 사라지고 만다.
기억이 인격으로서 존재한다면, 신화 속 므네모시네 여신처럼, 나는 열렬한 추종자가 될 것이다. 그때 욕심 많은 이 불쌍한 존재를 레테 여신이 가만두지 못하고 구하러 오지 않을까. 저장하는 기쁨과 삭제의 욕구속에 얼마만큼의 지분을 현명하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오늘치 행복이 나와 함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