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나는 여전히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머리맡에 조명을 켜둔다. 침대에 누워서 은은하게 졸린 밤이 계속되면 독서등의 대가리를 침대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선물 받은 포챠코 안대를 쓴다. 깜깜한 시간. 흑백의 시간 속에서 어떤 날에는 깜빡하는 순간 잠이 들고 또 어떤 날에는 이대로 영영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얕은 걱정을 하며 잠에 든다.
오늘은 자기 전에 일간 이슬아 수필집 단편 2개를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호언장담이라는 챕터이다. 호언장담 챕터가 미치도록 좋아서라기보다는, 호언장담이 좋다고 호들갑을 잔뜩 떨어놓은 과거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좋다. 각기 다른 밑줄, 포스트잇, 메모가 몇 년 간의 시차를 두고 남겨져있다.
하루만 지나도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를 텐데 몇 년 동안의 난 그 글자들을 좋아했네. 처음에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지금도 좋네, 그러니 미래에도 분명히 좋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 관해 애틋한 마음을 느꼈다. 왠지 나르시스트처럼 느껴지지만.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게다가 내 방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비밀이니까 괜찮다.
내 방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한 달 내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베이징 여행을 다녀오느라 삼 일 동안 집을 비웠다. 이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운 건 처음이라 비밀번호를 누를 때 겁이 났다. 혹시 방이 개판나있으면 어떡하지. 혹시 내 식물들이 다 엎어져있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방은 고요하고 무탈했다. 다만 엄청 이상한 냄새가 났다. 삼 일 비웠다고 이렇게 냄새가 나다니, 주방 하수구란 정말 쓰레기 같군. 생각하며 짐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쳤는데, 그만 주방 바닥에서 찰랑이고 있는 검은 액체랑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게 뭘까 생각하기도 전에 뚜껑이 활짝 열린채 채 바닥에 놓인 빈 쯔유통을 발견했다. 쯔유가 원래 있던 자리인, 냉장고 옆을 확인했더니 자석으로 붙여둔 소스통과 소스들이 바닥으로 추락해 있었다. 쯔유는 테무산 싸구려 자성에 몸을 맡기는 바람에 바닥에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고 만 것이었다. 쯔유추락사(with 간장 식초 알룰로스).
그 광경을 본 나는 흠칫 눈물이 날 뻔했다. 하필 집을 비울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만리장성의 만 리 길을 걷고 택시와 비행기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 없는 6층까지 대왕 캐리어를 들고 올라와서 잔뜩 지쳐있는 지금 쯔유를 닦아야 한다니. 심지어 쯔유는 냉장고 바닥과 책상 밑까지 흘러들어가 있었다.
멍하니 5분 정도 있다가 언니한테도 말하지 않고, 인스타에도 올리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절망하지도 않고, 덤덤하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줍줍해온 키친타올을 모두 쓰고, 마트에서 산 싸구려 휴지 반 통도 썼다. 물걸레로 닦았고, 다시 물티슈로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찐득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서 그 위에 소독약을 잔뜩 뿌렸다. 냉장고까지 이리저리 옮겨야 해서 한 시간을 청소하는 데 썼다. 그리고 나서는 마치 싸이코패스처럼 곧바로 캐리어를 풀었다. 난 최소 일주일은 캐리어를 풀지않는다. 역사가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는 샤워를 곧장 했다.
나는 심장이 없어. 노래가 생각났다. 마치 체력의 한계를 인지하고 모든 걸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AI처럼 행동했다. 다만 앞으로는 절대 테무산 자석을 믿지 않으리. 절대 집에 쯔유같은 걸 들이지 않으리. 절대 쯔유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으리. 절대 소스를 사면 무조건 열심히 먹어서 빠르게 해치우리 생각했다. 왠지 이성적인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새벽.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한다. 진정한 어른이란, 만약 나의 미래 남편이 바람을 피우게 된다면, 걔를 어떻게 족칠지에 관해 떠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은 기분을 참고, 내일을 위해 잠에 드는 사람일 것 같다고, 스물일곱살의 나는 생각한다. 새벽 감성에 취해 느끼한 말을 블로그에 잔뜩 뱉어내고 싶은 마음을 참는 사람인 것 같다고, 스물일곱살의 나는 생각한다. 쯔유를 닦으며 울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스물일곱살의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