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넘어 창작마저... 허물어지는 인간 고유의 영역', '어두운 욕망까지도 입력하는 대로 구현... AI윤리 다시 수면 위로', '챗 GPT와 혼술을',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기사와 칼럼의 제목들이다.
엊그제 국숫집에 갔다가 키오스크 앞에서 주춤거리는분의 주문을 도와드렸다. 지난해 가을에는가평에 있는 어느식당에 갔었는데 로봇이 식탁까지 음식을 날라주는 대접을 받았다. 음식 그릇을 다 내려놨는데도 계속 서있길래 '팁을 줘야 하나?'라고 농담을 주고받았는데,'돌아가기' 버튼인가 '완료' 버튼인가를 누르니 '감사합니다'하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항상 그렇듯 변화는 이미 우리 곁에 와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컴퓨터를 기반으로 변화하는 일상은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AI는 이미 '지능'을 지녔다. '의식'을 갖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일 것 같다. 섬뜩하지만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미래다.
옛날이라고 사회의 변화가 느리기만 했을까? 지금 우리들의시각에서 보면 '느릿느릿'했겠지만, 당시의 사람들도 시대 변화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던 때가 있지 않았을까?
베토벤Beethoven(독일, 1770~1827)이 활약하던18C 말과 19C 초반이 그랬을 것이다. 당시유럽 사회의 중요한 변화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에 명예혁명(1688년)이 일어나 의회 중심의 입헌군주제(권리장전) 토대가 마련되었고 미국에서는 독립 혁명(1776년)을 통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륙에서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이 일어났다. 더 이상 봉건 계급질서로 세상을 떠받칠 수는 없었다. 귀족계급은 점차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새로운 부를 축적한 신흥 상공업자 시민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었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도 고전주의 끝자락에 있었는데 '끝자락'이라는 것은 뒤를 잇는 낭만주의 사조가 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다리를 놓았다' 또는 '낭만주의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작곡가들(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왕족이나 귀족에게 예속되어 그들을 위해 작곡하고 연주해야 했다. 반면 낭만주의(주로 19C)는 왕족과 귀족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느낌과 감정, 개성과 열정'을 자유롭게 뽐내는 시대였다.
하지만 베토벤은 귀족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런 배경에는 귀족계급의 몰락이라는 시대 변화의 영향도 있었겠고 자유분방한 베토벤의 기질도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든 귀족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예속되지는 않았던 일종의 '프리랜서'형? 작곡가였다.
'프리랜서'라는 말이 성급한 적용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예술가로서 그의 자의식은 뚜렷했고 자존심은 셌다. 심지어 자신을 후원하던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당신이 공작일 수 있는 것은 가문과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미래에도, 수많은 공작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 명뿐입니다._[더 클래식 하나, 문학수 303p.]
예술가로서 자의식이 뚜렷했던 '프리랜서'형 작곡가였지만 베토벤은 많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다. 그중에 빼놓을 수 없는 후원자가 바로 루돌프 대공 Archduke Roudolph (오스트리아, 1788~1831)이다. 대공(大公)은 황제의 아들 즉 황태자를 이르는 호칭으로, 루돌프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인 1803년부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 시작한 후원은 베토벤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고 베토벤에 의지하며 존경했다. 베토벤 역시 자신의 고민과 실연의 아픔을 털어놓는 편지를 쓸 만큼 마음을 터놓았다.
평민과 대공의 신분이었고 열여덟 살 차이 나는 스승과 제자였지만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은 친구였다.
베토벤은 훌륭한 곡을 작곡하여 대공에게 헌정함으로써 신의에 보답했다. 그에게 헌정한 곡은<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비롯해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피아노 3중주곡 제7번 B플렛 장조> 등 14곡이나 된다.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은 나폴레옹의 빈(Wien) 침공으로 대공이 빈을 떠나게 되자 '대공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과 재회의 염원'을 담은 곡이다. 특히 이번에 감상할 <피아노 3중주곡 제7번 B플렛 장조>에는 아예 대놓고 <대공>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서 헌정했다.
베토벤이 <대공>을 작곡한 것은 마흔한 살인 1811년이었다. 3 년뒤인 1814년 청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베토벤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여 초연했다. 당연히 연주는 엉망이 되었다.
이 연주를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 베토벤은 더 이상 공개 연주를 하지 않았다.
영롱한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는 첫 부분이 인상적인 <대공>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 40여분 길이의 곡인데, 3악장과 4악장은 쉼 없이 이어진다. 단출한 악기 구성이지만 효과는 협주곡 급이다. 고상하고기품 있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