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성조 Jul 23. 2023

서이초 교사를 애도하며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희생이 헛되질 않기를,

이제는 우리 모두가 행동하기를 바라며.



 학교. 특히 그중에서도 초등학교는, 사실 공부를 하기에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공간이다. 성적도 제각각, 학업 수행 능력도 제각각, 성격도 제각각인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어놓고, 똑같은 교과서로 함께 공부한다.


 학교가 효율성 높은 지식 누적을 추구하는 공간이라면 훨씬 쉽고 간편한 방법이 있다. 입학을 하면 먼저, 아이들의 수준 파악을 위해 일괄적으로 시험을 친다. 성취 수준별로 학급을 쭈욱 나눈다. 아이들의 단계에 맞는 수업을 개별적으로 진행한다.


 생활 지도가 어렵거나, 특정 학업 성취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올 수 없도록 한다. 갈등이 일어나면 곤란하니 점심시간 및 놀이시간은 대폭 축소하거나 없앤다. 학생수도 한 학급당 4~5명 정도로 확 줄여버리면 더 좋겠다.


 아쉽게도 학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쉬운 길을 놔둔 채 어려운 길을 돌아간다. 공부만 시키면 될 것을 굳이 굳이 점심시간을 줘서 싸움을 만들고, 스스로 시간표를 짜오라느니, 일인 일역을 하자느니 귀찮은 숙제들을 참 자잘히도 만들어내 기어코 학부모 민원도 받아낸다.

 

 성별, 성격, 성적, 성취도 하여간에 뭐 하나 비슷한 게 없는 20~30명 남짓의 아이들을 가차 없이 뺑뺑이로 돌려 한 반에 집어넣어 버린다. 아이들은 서로를 처음 대면하며, 사회의 규칙들도 만난다.


 혈연으로 묶여있지 않은 새로운 하나의 세계에서 부대끼며 싸우고 울고 화를 내며, 다름에 고통받으며, 또 1년을 그렇게 함께 지낸다.


그러나 학교가 굳이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하는 데도 다 이유가 있지 싶다. 2022년 개정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교육과정은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추구해 온 교육 이념과 인간상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함양하여 포용성과 창의성을 갖춘 주도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둔다.


 학교는 지식 축적을 위한 곳이 아니다. 이곳은 포용성 창의성을 갖춘 주도적인 인간으로 사람을 성장시키는 공간이다. 나도 장활한 문서 읽는 건 징그럽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교육과정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교육과정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해 교과 교육과 창의적 체험활동을 포함한 학교 교육 전 과정을 통해 중점적으로 기르고자 하는 핵심역량은 다음과 같다.

가. 자아정체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과 진로를 스스로 설계하며 이에 필요한 기초 능력과 자질을 갖추어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기관리 역량

(중략)

라. 인간에 대한 공감적 이해와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고 향유하는 심미적 감성 역량

마. 다른 사람의 관점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상호협력적인 관계에서 공동의 목적을 구현하는 협력적 소통 역량

 바. 지역⋅국가⋅세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개방적⋅포용적 가치와 태도로 지속 가능한 인류 공동체 발전에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게 참여하는 공동체 역량         


  포용성의 시작은 나와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나랑 다른 인간을 만나 봐야, 얘를 포용하든 말든 할거 아닌가? 나와 다른 인간을 처음 만나 당황하고, 지긋지긋하게 욕하고 싸우다가도,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며, 내 의견을 표현하고, 다름을 이해하고 그러다가 화해하고, 협력하며 함께 성장하는 것.

 

 학교 생활에서 타인과의 갈등은 필연적이고, 필수 불가결하다. 건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아이들은 잘 싸우고, 잘 화해해야 한다.

   



  교직 생활 n년차 만에 마침내 잔소리봇 꼰대가 되어버린 건지, 슬슬 '요즘 애들은 말이야'로 시작되는 잔소리가 입 밖으로 슬슬 튀어나올랑 말랑하는데, 요즘 풍문으로 들려오는 민원의 대부분은 이런 것이다.


 '우리 아이가 ~~ 한 갈등 혹은 교육 활동으로 많이 힘들어해요.'


  그런데 사실은... 갈등은 원래 힘들다. 배우는 것도 당연히 힘들다. 학생들이 공동체 안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공동체 생활은 원래 불편한게 맞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스스로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학교에 전화를 해서 직접적으로 해결해 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면,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물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지속적인 언어적, 신체적, 성적, 금전적 괴롭힘은 당연히 논외인 거 아시죠? 오해 없으시길).

 

  아이들은 누구나 학교에서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고통의 과정을 겪는다. 마음이 한 단계 성장 할 엄청난 기회의 시간이다. 타인(친구나 선생님)에게 어떻게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를 아이가 먼저 고민하고 스스로 실천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른들은 참지 못한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아이들의 세계에 침투해, 어려움을 순식간에 제거해 버리고, 이제 네 앞에는 눈물과 고통과 슬픔 없는 꽃길만 있을 거라며 뿌듯해한다.


'A와 B는 자주 싸우니 앞으로 말을 섞지 않는다고 각서를 쓰자.' 라든가,


'C반과 D반에 서로 싸운 학생들이 있으니, 반별 협력 활동을 없애서 못 만나게 하고, 급식 시간도 조정합시다!' 라든가,

 

'00 이가 일기 숙제를 힘들어하고 글씨 쓰기를 어려워하니, 안 해도 괜찮아. 숙제를 안 해와도, 넌 소중해 ' 해버리던가,


'작년 몇몇 학생들이 발표 잘하는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느낀다는 민원을 받았으니, 올해 개인별 발표 프로젝트는 아예 생략해야겠다' 해버리거나,


'타고난 재능이 성취도를 좌우하는 체육에서 '보통'을 받으면 속이 상하니 노력 점수를 포함해서 '매우 잘함'으로 수정하는 것도 좋겠네요' 하고 있지도 않은 노력 점수를 더해버리던가.


  사실 이런 해결법들은 참 간결하고, 깔끔하며, 또 진짜 편하다. 교사들이 이렇게나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굳이 학부모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며 돌아가는 것은, 우리 아이를 싫어해서도 아니고, 학급 세계의 규칙을 감히 어기려는 학생에게 고통을 주고자 함도 아니다.


 그건 죄책감이다. 학부모 민원이 피곤하다며, 편하게 가는 게 좋은 거라며 아이들 눈앞에 놓인 성장의 기회를 교사 스스로 놓아 버렸을 때 느끼는 일말의 죄책감.


 탈피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워 보인다며, 애벌레 고치를 가위로 잘라달라 요구하는 사람을 더 이상 설득하기가 지쳐 '그래요, 그럽시다' 해 버린 날 저녁, 갑자기 떠오르는 그 아이의 얼굴.  


 그리고 하나 더, 교사의 생존과 안위. 나의 교육활동이 아동학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지만, 결국에 들려오는 이야기들.


"0학년 0반 선생님, 병가 들어가셨어요."

"나 국민 신문고에 신고당했어."

"저번주에 교실에서 칼부림 났어. 이직 준비 중이야."

 

 운이 없다면 내년에는 나에게도 벌어질지 모르는 일. 밤낮으로 학생 교육과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학급의 문제가 '개인의 무능'으로 치부될 때의 정신적 고통. 일부 학부모나 관리자, 교육청 등 모든 교육의 주체들이 교사라는 개인을 보호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비난할 때의 그 무력감.




  스스로를 모래알이라 자조하던 교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업무를 과중시키는 사업이 매해 들어와 골머리를 썩을 때도, 짜디 짠 월급에 생활이 점점 어려워져도, 그놈의 '그래도 너희는 방학 있잖아!' 한마디에 '그건 그렇지!' 하면서 웃고 말던 사람들을 각성시킨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더 이상은 무력해지고 싶지 않다는 외침. 아이들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싶다는 모두의 마음이 한데 모인 2023년 7월을, 나는 꽤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