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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Jan 08. 2024

쓰리 빌보드: 증오의 악셀을 떼려면

나의 고통을 전시하기, 남의 고통을 관람하기


왈라비 경찰 서장과 주민들: 종합적 판단이라는 함정


먼 곳에서 용감하기는 쉽고 안전하다고 했던가. 누구나 멀리선 남의 고통에 연민하지만 가까이에선 얘기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해외 소수자 인권에는 '좋아요'를 누르다가, 국내 퀴어 축제에는 '굳이...'라며 거리를 두는 사람은 주위에도 흔하다.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교통을 방해하니까"... 강 건너에선 옳고 그름만 따지면 됐을걸 나와 가까워지니 고려할 게 늘어난다. 이걸 '종합적 판단'이라고 그럴듯하게 불러볼 수도 있을까. 그럴싸한 이름 아래 딸린 '고려 사항'들이 정말로 고려할 사항들일까. 아니면, 신념껏 목소릴 내지 못한 나를 위한 변명일까. 왈라비 경찰 서장은 범인을 색출할 책무가 있지만, 주민들은 평소에 근면 성실했으며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그의 평판과 질병이 그의 책무를 덜어줄 요인으로 고려되는 것이 온당할까. 


밀드레드의 광고판: 나의 고통을 전시하기, 남의 고통을 관람하기


모두는 고통에 적당히 연민하다 적당히 잊고 싶어한다. 좀 더 비관적으로 말하면, 파리한 연민을 보이고 그들의 처지와 다른 나를 비교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어한다. 연민을 넘고 공감이 되어 내 피부에 닿는 순간, 그것은 나에게 고통으로 변한다. 그러나 피부에 닿지 않는 연민, 행동으로 변하지 않는 연민은 썩어빠진 자기 위안에 그치는 일일지 모른다. 빌보드에 적힌 밀드레드의 고통은 그들에게 너무 가까웠다. 너무 적나라하며 너무 오래 게시되었다. 주민들 입장에서 적당히 연민하고 잊고 넘기고픈 고통을, 밀드레드는 지나치게 오래 전시해버린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 불편하다는 점이 고통의 이야기를 멈추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불편하게 만드는 것, 연민을 넘어 공감과 고통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고통의 이야기가 가진 목적이기 때문이다. 



밀드레드: 애써 잊기로 한 사람, 아무리 애써도 잊을 수가 없는 사람, 


또, 고통을 전시함에 있어 불편함과 고통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당사자나 가족보다 더 고통을 느낄 사람은 없다. 고통의 당사자는 여기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아들처럼 애써 잊고 살기로 하든가, 밀드레드 본인처럼 애써 잊는 것이 불가능해 목소리를 내든가. 잊는 게 불가능한 밀드레드라는 유형은 그 고통을 꺼내어 매일 마주해 잊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분노의 방향은 옳게 흐르고 있나


뭐가 됐든 사람은 이유를 찾고자 한다. 갑작스러운 관계의 상실 역시 관계를 상실케 만든 원인을 찾고 싶게 한다. 딸의 마지막 날을 보여주는 플래시백("오다가 강간이나 당해라")을 보면, 사실 밀드레드에게 있어 최고의 분노의 대상과 책임의 대상은 자신이었을거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기에, 밀드레드는 가해자에게 그 탓을 돌리고 싶다. 그런데 가해자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찰서장에게 분노가 옮겨간다. 책임을 가진사람에게 자신을 향한 책임과 분노를 모두 돌린다. 왈라비 주변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왈라비가 죽은 이유를 여자에게로 돌린다. 또, 경찰은 광고회사사장을 패고, 여자는 애먼 경찰에게 화상을 입힌다. 우리의 분노란 이런 식이 아닐까. 그저 보이는 것을 냅다 집고는 마구 휘두르는 식이다. 뭐가 맞는지도 누가 맞을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결국은 용서와 사랑 뿐


경찰인 딕슨이 광고회사사장을 쥐어 팬 뒤, 딕슨도 폭발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렇게 둘은 병원에서 만난다. 광고회사사장은 딕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다가, 딕슨임을 알자 당황한다. 그럼에도 그는 증오를 끊고 연민을 보낸다. 증오가 증오로 이어지지 않는 방법은 오직 용서하는 방법 뿐이다. 딕슨이 다친 불쌍한 사람이라는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딕슨에 대한 연민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를 가해했다는 사실 뿐이다. 광고회사사장이 자신을 가해한 것을 용서했을 때, 두 사람간의 증오는 사라지게 된다. 뻔한 얘기지만, 해결할 방법은 사랑 뿐이다. 싸움이란 게 그렇다. 빈정상한 말 한마디가, 욕으로 되돌아오고, 욕은 주먹으로 받아치다가, 주먹은 물건으로 되돌아오는 식이다. 그러다보면, 빈정상하게 한 말 한마디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게된다. 내가 분노의 대상으로 삼은 그 대상은 정확한가.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한다. 모두가 아는 그 얘기다. 그저 이제는 분노를 해소하고 싶을 뿐이다. 



딕슨과 밀드레드가 살인하기로 맘먹은 날,  살인의 대상 또한 진짜 범인 즉 진짜 분노해야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딕슨과 밀드레드는 죽이지 않았을거다. 딕슨이 광고회사사장과 왈라비로 부터 용서를 배웠을 때, 밀드레드가 딕슨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때, 그들은 분노의 악셀을 떼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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