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그다드 카페'
상설 시장엔 오일장까지 겹쳐 사람들로 북적인다.
늘어선 노점들 때문에 좁아진 도로 탓도 있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들 때문에 멈출 수도, 차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꼼짝없이 앞 차를 따라 직진할 수밖에 없다.
목적지를 한참 벗어나 너른 앞마당이 있는 경찰서를 지날 때에야 간신히 차를 돌린다.
일단 차를 돌려놓고 밀려드는 차들이 빠지길 기다린다.
그때 저만큼 떨어진 노점상에서 두 여자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급기야 싸움이 시작된다.
늙은 호박이니 가지, 부추를 늘어놓은 노점상의 주인과 손님인 듯하다.
"저 옆에선 팔천 원이라는데, 여긴 더 작은데 무슨 만원이래요?"
"그러니까, 그 집 가서 사라고요!"
허리춤에 전대를 둘러맨 여주인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손님을 향해 연신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그런 주인의 모습에 잔뜩 약이 오른 손님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다.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얼추 비슷해야 말이 되지. 한 오천 원만 받으면 될 걸. 욕심이 하늘을 찌르네, 찔러."
"내 물건 내가 값 쳐서 받겠다는데, 안 사면 그만이지 뭐 그래 말이 많을까 모르겠네, 이 아줌마가!"
결국 삿대질이 오가며 주위의 상인들이 두 여자의 싸움을 말리기 시작한다.
그때, 노점 뒤 중국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나온다.
휘청이는 발걸음과 풀린 동공, 아마도 얼근한 낮술에 취한 모양이다.
그는 싸우는 노점 여주인을 향해 다가오더니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짐 싸! 그깟 거 팔아서 뭐 대단한 돈 번다고! 이 놈의 여편네가 어디서 쌈질이여!!"
남자는 기어코 난전의 늙은 호박 하나를 냅다 차 버리고는 중국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잠시 싸우던 두 여자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당혹한 얼굴로 서 있던 손님은 저만치 나뒹굴고 있는 늙은 호박을 주워온다. 호박 옆구리가 움푹 파여 있다.
"그냥 줘요."
한숨을 내쉰 여주인은 손을 내젓는다.
"됐어요. 그냥 가세요."
"아, 줘요. 깨져서 팔 수도 없겠구만."
결국 손님은 늙은 호박과 가지, 부추까지 한 단 사서 돌아선다.
멀어지는 손님의 뒷모습에 '야스민'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뚝 떨어져서 살고 싶어. 다달이 생활비만 보내준다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온 것처럼, 단숨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하잖아. 현금인출기도 아니고."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들은 흔히, 쉽게 착각한다.
'나 없이 잘도 살겠다.'
하지만 '너'없이도 잘 살 수도 있다는 걸, 아니 '너' 없으면 더 잘 살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한 번쯤 '브렌다'가 된다.
그때는 상상도 못 했었다. 이 영화가 '코미디'라는 걸.
그땐 뭐가 그리 항상 심각하고 진지했었던 걸까?
생각해보면 경험하지 못한 일은 늘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결혼이라는 것, 혹은 실패하며,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28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공감할 수 있는 화두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괜히 폼 잡으며 그 속에 숨은 은유와 상징을 찾으며 심각한 '척'했었다고 순순히 자백한다.
솔직히 화만 내는 '브렌다'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남의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야스민'에게 공감할 수도 없었다.
(그래, 유명하다니까, 뭔가 있나 보다... 하고 괜한 폼만 잡았었지.)
나이가 들어보니, 매사에 짜증이 치솟는 내가 '브렌다'요, 내 새끼에 집착하는 내가 '야스민'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상황마다 절절히 공감하고, 함께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 그래, 이 영화는 완벽한 코미디구나!' 하고 무릎을 치는 바이다.
'브렌다'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엉망진창 쑥대밭 같은 사무실을 청소해준 '야스민'에게 도리어 화를 내며 원래 대로 해 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브렌다'에게 공감한다.
늘 맘에 안 들어 화만 내는 내 아이들을 감싸고도는 낯선 여자를 경계하는 '브렌다'도 이해가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과잉친절을 베푸는 '야스민'이 달갑지 만은 않은 것이다.
무슨 꿍꿍이지? 뭘 바라는 거지?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경계를 치고, 손톱을 바짝 세운다.
'넘어오면 아프게 할퀴어 줄 테다!'
황량한 사막에 살고 있는 불쌍한 '브렌다'!
억수 같은 소나기를 맞아 호되게 앓아 본 사람은 우산을 나눠 쓸 줄 안다.
'야스민'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이나 큰 우산을 가진 사람이다.
견딜 수 없어 남편을 떠나온 '야스민'은, 견딜 수 없어 남편을 떠나보낸 '브렌다'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스민'은 '마술 상자'를 열어 '브렌다'의 삶에 마법을 건다.
마법은 적중했고, 성공했다.
'브렌다'는 다시 웃기 시작했고, 황량한 사막의 찾는 이 없던 바그다드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라스베이거스를 능가하는 '야스민'의 마법 쇼.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야스민'의 마법 쇼가 펼쳐지는 바그다드 카페는 사막을 오가는 트럭 운전수들의 성지가 되어간다.
'나 없이 너 혼자 잘도 살겠다.'
라는 착각에 단단히 빠진, 독단과 독선에 빠져 아내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남편이 있다면,
현명한 아내여,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이 영화를 함께 보시길 바란다.
'너'의 부재 위에서 마법은 시작되고, 화려한 쇼의 막이 오르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시작된다.
부디, 그대 있음에 만사형통이라는 호두껍질 같이 단단한 착각은 깨버리시길.
홀아비 삼 년에는 이가 서 말이고, 홀어미 삼 년에는 은이 서말이라.
굳이 이런 말을 빌려오지 않아도,
아내들이 만들어내는 기적에 의심하지 말 것이다.
그러니, 남편들이여, 기적을 품고 있는 아내에게 부디 '있을 때 잘하시길'.
봄바람에 미친 여자 널뛰기하듯,
가끔 가슴 뻐근해지도록 높이 올라가는 날이 있다면,
그 높이만큼 떨어지며 가슴 철렁해지는 날도 있는 법.
바그다드 카페의 북적이는 마술 쇼에 초대되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현란한 '야스민'의 손재주에 속아 환호성을 지르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도.
돌아서 나오면 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질퍽한 길이 있는 걸.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종종 이 영화를 볼 것이다.
끝없는 집안일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짜증이 끓어오르고,
눈치 없는 미스터 김에게 신경질이 날 때.
해열제를 찾듯 이 영화를 찾을 것이다.
화가 내려가고, 짜증이 진정되고, 신경질이 가라앉길 바라며.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내게도 '야스민' 같은 마법이 한 번쯤은 찾아오길 바랄지도 모르겠다.
거기요, 혹시 듣고 계신가요?
나한테도 '야스민'같은 마법이 한 번쯤 필요하다구요!!
- 이건 쓸데없는 오지랖.
바그다드 카페가 성공하자, 브렌다를 떠난 남편이 슬며시 돌아온다.
브렌다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그를 끌어안아준다.
아~ 브렌다!
나 같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