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정말 발목이 시려
가을부터 혼자 부르는 사모곡
입추가 지나자, 아스팔트에 이글거리던 열기가 사그라들 듯, 몸도 마음도 서늘한 바람에 가라앉는다.
그래도 아직 한낮 기온은 30도를 넘는다.
무심코 선풍기를 켜 놓은 채 TV를 보다가 발목이 시려 서둘러 껐다.
내 기억엔 발목이 시린지 5~6년 쯤 되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몸에서는 열이 빠지지 않아 더운데도 발목은 찌릿찌릿하게 시리다.
11년 전, 겨울. 엄마의 주문에 걸려 버린 것이다.
평생 발이 시릴 때마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 둘째딸의 생일은 12월 29일이다.
예정일이 1월 29일이었는데,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아이는 꼭 한 달 일찍 태어났다.
다니던 산부인과에서는 혹시 모를 응급 상황을 걱정하며 인큐베이터가 있는 근처 대학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배와 가슴에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대기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수술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로 향하는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복도 천장의 형광등이 휙휙 빠르게 지나갔다.
수술 침대의 차가운 시트에 후르르 떨며 UFO처럼 커다란 무영등이 신기하다... 하는 사이, 나는 까부러졌다.
5층 신생아 집중 치료실,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감사하고 한편으론 머쓱하게 딸은 가녀린 아기들 사이에서 새카맣고 빼곡한 머리숱을 자랑하며 위엄있게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무게는 무려 3Kg을 넘었다.
아무리 보아도, '집중 치료실'이 필요한 아기 같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아마도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임신주수를 잘못 계산한 게 아닐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면회온 산모들은 우리 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아기는 왜 여기 있어요?"
병원 조리실에서 새해를 맞고 아이와 집으로 돌아온 것은 1월 5일이었다.
눈이 얼마나 왔는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쌓인 눈이 집어삼켜 세상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저 멀리 고가도로 위를 달려가는 커다란 트럭의 덜컹이는 바퀴소리가 비현실적으로 풍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상은 너무 밝고, 조용했고, 추웠다.
아이는 집에 돌아온 것에 안도했는지 까탈스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잤다.
산후조리를 도우러 집에 온 엄마가 보일러 온도를 얼마나 올려 놓았는지 방안은 영락없는 찜질방이었다.
"더워도 참아. 적어도 삼칠일은 꽁꽁 싸매고 있어야 해."
"아이고 엄마. 큰 애는 9월 초,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아, 산후조리원에선 에어콘도 틀어주던 걸."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그러는 게 아냐. 이거 입고 있어."
엄마가 내민 것은 분홍색 하트무늬 수면잠옷이었다.
잠옷의 두께보다 불편한 것은 아이 낳은 직후, 아직 불러있는 배에 조여오는 고무줄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입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양말은 도통 신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답답했다.
맨발을 드러내고 다니는 나를 보며 엄마는 혀를 찼다.
"너 그러다 나이들면, 발목 시리다."
순간, 엄마의 말이 내 발목을 잡아버린 것이다.
엄마는 6년 전, 세상을 달리하셨다.
췌장암 선고를 받으시고, 6개월.
더는 자식들 고생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신 듯, 모든 자식들이 잠든 새벽에 홀로 고요히 떠나셨다.
이른 봄이었다.
엄마를 모신 납골당은 고향에 있는 산사였는데, 제법 높은 산 중턱에 있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득하고 고즈넉했다.
엄마를 모시고 얼마 후, 산골짜기 마다 온갖 산꽃, 들꽃, 풀꽃들이 색색으로 피기 시작했다.
꽃 좋아하던 우리 엄마, 잔디에 앉아 해지는 줄도 모르고 꽃을 보겠구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면, 곳곳에서 빨간 넝쿨 장미가 피기 시작했다.
그 꽃을 볼 때마다 또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좋아해 예전 우리 집의 담 아래에도 심겨져 있던 꽃이었다.
야속하게도 빨간 넝쿨 장미는 너무나 흔했고, 너무나 오랫동안 꽃을 피웠다.
골목에서, 공원에서, 관공서에서, 혹은 어느 집 울타리에서 그 꽃을 마주쳤다.
여름 내내 엄마는 환영처럼 빨간 넝쿨 장미 아래 어디에나 계셨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면 가을.
그때부터는 발목이 시려온다.
발목이 시릴 때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너 그러다 나이들면, 발목 시리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발목부터 시작해 발바닥까지 시리다.
시린 기운이 가시면 이내 따끔거리며 화끈거린다. 가을부터 겨울 내내 발이 수난이다.
양말을 신고 있다가, 화끈거리면 벗어던지고, 또 시려서 찾아 신고...
그렇게 겨우내 양말을 벗었다 내던졌다 하면서, 엄마의 말이 - 그 말을 할 때 흘겨보던 엄마의 얼굴이 - 생생하게 떠오른다.
"너 그러다 나이들면, 발목 시리다."
"너 그렇게 고집 세면, 꼭 너같은 딸 낳는다."
맞다. 둘째는 나를 닮아 고집이 세다.
"애들 밥 멕일라고 애쓰지 마라. 나중엔 그만 먹일라고 애쓴다."
맞다. 나는 우리 막내가 뭘 먹고 싶어할 때가 가장 겁난다.
"살 너무 빼지 마라. 배에 힘 없어서 허리 굽는다."
엄마 그건 다시 찌면 돼. 나는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참, 엄마 말 안 듣는 딸이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엄마 말이 맞았다고, 말 안 들어서 죄송하다고, 조아릴 일이 이리도 많으니 말이다.
'엄마, 엄마 말대로 정말 발목이 시려. 어쩌지?'
엄마의 매운 손이 등짝을 내려친다.
"고 봐라. 말 안 듣더니."
그 매운 손이 그리운, 오늘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