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을린 사랑'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기도문 없이 묻어주세요.
세상과 등질 수 있도록 시신은 엎어 놔 주세요.
비석은 놓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마세요.
약속을 어긴 자는 비문이 필요 없죠.
.....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됩니다. 햇빛 아래에'
-나왈의 유언 중
직원은 한 시간 삼십 분 정도 걸릴 거라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건물 뒤편에 마련된 휴게소로 향했다.
모두가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웃었는지, 울었는지, 한숨을 내쉬었는지, 하늘을 쳐다보았는지, 땅을 내려다보았는지...
누군가 준비해 온 오렌지를 건넸다.
벗겨진 오렌지 껍질에서 터지던 과즙과 향기가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그것을 먹은 기억은 없다.
70년의 인생이, 재로 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
비닐봉지 안에 담긴 오렌지가 마루 위를 데구르르 굴러갔다.
휴게소 안의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색이 바랜 그림처럼 앉아 있거나, 서 있었다.
누군가 커피 자판기를 찾아 일어섰고,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휴게소를 나왔다.
맥없이 휘휘 자판기를 향해 걸으면서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
문득 어디선가 클락션 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지붕 위의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지 않았던가?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흐트러짐 없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오렌지 한 알과 하늘로 오르던 연기만이 기억날 뿐, 화장터의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납골당이 있는 절에 도착해서야 산의 쨍한 푸른빛에, 맑은 공기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본당 처마에 매달린 스피커에서는 끝없이 반야심경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안도했다.
드디어 안락한 곳에 도착했어. 엄마.
누구나 가까운 이의 죽음을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황망함과 경황없음에 그 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삼일장이 끝나버린다.
일상에 돌아와 망자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리는 그동안 듣지 못했던 질문의 뒤늦은 답을 듣기도 한다.
가끔 망자는 산자에게 질문 하나쯤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그 답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어떤 답은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너'의 삶이 두렵다.'
- 을의 철학, 손수진
영화 '그을린 사랑'은 엄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전해 듣는 쌍둥이 남매 시몬과 잔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공증인이 건넨 두 통의 편지, 딸과 아들에게 남기는 엄마의 부탁이다.
아버지와 오빠(형)를 찾아 편지 한 통씩을 전해 달라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와 존재 자체도 몰랐던 오빠(형)를 어찌 찾으란 말인가?
동생 시몽은 생전에 괴팍하던 어머니의 얄궂은 유언을 무시한 채 장례를 치르겠다고 우겨댄다.
잔느 역시 미지수뿐인 거대 수식 앞에서 해법을 알지 못해 망연자실하다.
나왈의 딸, 잔느는 수학자이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대학 강의실 장면은 이 영화의 거대한 복선이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알던 수학은 명확하고 한정적인 답을 얻는 것이 목적으로,
명확하고 한정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죠.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게 되죠.
사람들은 여러분이 파고드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 하겠죠. 여러분은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 될 거니까요. 그것이 바로 이론 수학입니다.
고독의 나라인 것이죠."
죽은 자의 마지막 부탁은 신성한 것, 산 자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
결국, 잔느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어머니의 고향, 데롬 마을로 향한다.
이후, 잔느의 행적을 따라 드러나는 나왈의 이야기.
사랑하는 남자 친구 '와합'은 오빠가 쏜 총에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와합이 그들(기독교인)과는 다른 힌두교도 난민이라는 이유였다.
피비린내로 서막을 올린 비극은 점점 더 잔인한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왈을 몰아세운다.
그녀의 삶은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살아낸 지옥, 火炎地獄(화염지옥)이었다.
그 참혹하고 처참한 地獄圖에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쓰러질 듯 걸어간, 나왈의 발자국이 화인처럼 새겨져 있다. (실제로 영화의 원작은 레바논계 캐나다 작가인 와이디 무아와드 '화염'이라는 희곡이다.)
레바논 내전이 실제 배경이 된 영화에는, 끊임없는 복수전이 이어진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들이 목숨을 가져가면, 그들의 목숨을 되가져 오는 끝없는 폭격과 난사.
나왈이 타고 가던 버스 -버스 안엔 회교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 총을 든 기독교인들에 의해 멈춰진다.
개머리판에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을 붙인 총이 회교도인들을 향해 난사된다.
버스 안의 대부분 승객들이 총에 맞아 즉사하고, 나왈과 딸을 데리고 탄 한 여인만이 살아남는다.
잠시 후, 기독교인들은 버스 지붕으로 올라가 기름을 쏟아붓는다.
이제 그들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차에 불을 붙일 것이다.
순간, 나왈은 주머니에 숨겨둔 십자가 목걸이를 내 보이며 소리친다.
"나는 기독교인이에요."
나왈은 구사일생으로 버스를 벗어난다.
순간 나왈의 눈에 여인의 품 속, 어린 여자아이가 들어온다.
나왈은 지체 없이 여인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안는다.
"내 딸이에요."
그때, 아이를 넘겨주던 엄마의 슬픈 얼굴을 나는 잊지 못한다.
'부디 살아야 한다. 너만은 꼭 살아남아야 한다.'
아이를 안은 나왈이 버스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은 기름 범벅이 된 버스를 향해 총을 쏘아댄다.
버스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불길 속에 남겨진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여자 아이.
아이는 결국 나왈의 품을 벗어나 버스를 향해, 아니 엄마를 향해 달려간다.
아이의 걸음이 늦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총격이 빨라서였을까?
아이는 엄마에게 채 닿기도 전에 땅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아이의 순수함마저 종교라는 야만의 이름으로 처단된 순간이다.
버스를 집어삼키며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뒤로 한 채, 망연자실 무릎을 꿇은 나왈.
도대체 무엇에 닿기 위한, 무엇을 이루기 위한 전쟁인가?
나왈 마르완, 시몬과 잔느.
그리고 또 슬프고도 잔인한 두 개의 이름, 니하드 드 메 (5월의 니하드)와 아부타렉.
이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해결 불가능한 수식.
1+1=1.
사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무서움과 고통스러움에 한 동안 멍했었다.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난도질할 수 있단 말인가?
어째서 감독은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인공 '나왈 마르완'은 감독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 아니었다.
레바논 내전 당시, 실제 있었던 인물인 '수하 베차라'라는 여인이 그 모델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나왈'을 일컫던 '노래하는 여인'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는 수하 베차라.
레바논의 공산주의 무장단체 소속이었던 그녀는 스물한 살 때 앙타안 라하드 장군의 암살 시도를 했다가 감옥에 수감, 6년 간 모진 수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석방되었을 때, 그녀에게는 감옥에서 낳은 아이가 둘이었다.
그녀, 수하 베차라의 이야기가 '그을린 사랑'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망자의 이야기는 망자와 함께 땅에 묻혀야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은 망자의 삶을 차곡차곡 판도라의 상자에 넣어, 자물쇠를 채우고, 마침표를 찍음으로서 그 의무를 다 하는 것이다.
어떤 진실은 산 자를 집어삼킬 수도 있으니까.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산 자의 삶을 지옥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으니까.
다시,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너'의 삶이 두렵다.'
- 을의 철학, 손수진
그러나, 나는
나왈의 딸, 잔느의 미래가 평온하길 기도한다.
나왈의 아들, 시몬의 아픔이 치유되길 기도한다.
나왈의 삶에 애도를 표하는 내 삶이 정화되길 기도한다.
나왈의 비석 앞에 선 한 남자의 인생이 구원되었길 기도한다.
나왈로 인해, 우리의 삶이 '지옥'에서 건져올려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나는
지옥의 삶을 끝낸 '나왈'의 영혼이 은혜로운 천국에 머물길 기도한다.
그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길 기도한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천국에는 지상의 종교에서 '신'이라 명명한 존재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건, 多言.
수소문 끝에 잔느는 나왈의 수감 시절을 알고 있던 감독관을 찾아가게 된다.
멀리서부터 잔느가 탄 자동차가 감독관이 일하고 있는 학교를 향해 달려온다.
그 차를 본 순간, 어? 설마? 했다.
짧은 차체에 동그란 차형.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잔느가 운전석에서 내릴 때, 보였다.
핸들에 선명하게 새겨진 익숙한 로고가.
영화는 대부분 캐나다 몬트리올과 요르단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PPL은 아니었을 테고.
그 먼 타국에서 우리 자동차의 로고가 카메라 앵글에 잡혔을 때 느껴진 왠지 모를 뿌듯함.
편린처럼 반짝이는 반가운 카메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