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비극의 조건
할리우드의 원로 시나리오 작가 월터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객은 그[영화의 주인공]가 자신이 처해있는 처지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감정이입을 한다.” 지난 3화에서부터 말씀드린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기본 원리가 이것입니다. 이때 관객이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시나리오 가이드』에서 데이비드 하워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관객은 그들의 내면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마음(human heart suffering)’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강조하는 지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여전히 본받고 있는 극작술에 관한 고전 텍스트인데요. 특히 비극에 관한 논의가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3장에서 훌륭한 비극의 플롯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데이비드 하워드가 말한 관객이 주목하는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마음’의 극단에 공포와 연민이 있는 셈이지요.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해야 하는 세 가지 플롯에 대해 설명합니다. 첫째는 덕이 높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다가 불행한 삶으로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덕이 높은 사람이란 단순히 선하면서도 너그러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인품뿐만이 아니라 능력까지 빼어난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덕이 높은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는 연민도 공포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심지어 관객들이 도리에 어긋난 일처럼 느끼게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약한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살다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일단 비극적이지도 않고, 인정에 호소하는 면도 없으며,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극악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다가 불행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연민은 인물이 부당하게 불행해지게 되었을 때, 공포는 우리와 유사한 인물이 불행해졌을 때 환기되므로 이 경우 역시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비극은 어떤 이야기로 구성되어야 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비극의 주인공은 ‘덕이 높은 사람’도, ‘약한 사람’도, ‘극악한 사람’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공이 명망과 번영을 누리다가 불행에 처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때 그가 불행으로 떨어지는 계기는 그가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과오에 있어야 한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에 있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과실에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훌륭한 비극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또는 인품과 역량이 우리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명망과 번영을 누리다가 의도치 않게 저지른 과오로 인해 추락 또는 몰락하게 되는 이야기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은 우리에게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번에는 이 훌륭한 비극의 조건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명작’ 영화들에 적용시켜 볼까요?
먼저 <올드 보이>를 보겠습니다. <올드 보이>의 주인공은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오대수입니다. 이제 막 가장이 된 30대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남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엉망진창인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에게 납치돼 정체모를 시설에 감금됩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벌써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요. <올드 보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정확하게 부합하지는 않아도 꽤나 겹치고 있습니다. <올드 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영문도 모른 채, 기약 없이 어딘지 모를 곳에 감금되는 나락의 상황에 처합니다. 행복한 삶에서 불행한 삶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절체절명의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대수가 감금된 이유를 기억하시나요? 오대수를 감금한 자는 오대수의 동문 이우진입니다. 학창 시절 이우진은 자신의 친누나 이수아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학교에서 우연히 이우진과 이수아의 근친상간 장면을 목격한 오대수는 전학 가는 날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자신의 절친 주환에게 이 일을 꺼내놓습니다. 그러나 오대수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학교 전체에 퍼져 이우진의 누나 이수아가 사람들의 눈초리를 못 이기고 자살하게 됩니다. 이우진은 이 일을 오대수에게 복수한 것이지요. 즉 오대수가 감금된 까닭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처럼 ‘의도치 않게 저지른 실수’ 때문인 것입니다. 확실히 <올드 보이>는 고대 희랍 비극의 구도를 적극적으로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지점들 뿐만 아니라 근친상간, 복수 등 희랍 비극의 전형적인 코드들이 작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다크 나이트>를 볼까요.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에서 뿌리 깊은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악인들이 늦은 밤에도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니지 못하는 걸 보면 브루스 웨인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가는 듯합니다. 고든 경사와 협력한 마피아 소탕 작전이 꽤나 진척이 되어가던 무렵 느닷없이 괴인 조커가 나타납니다. 조커는 궁지에 몰린 마피아들에게 자금의 반을 주면 배트맨을 죽여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후 더욱더 궁지에 몰린 마피아 일당은 결국 자신들의 자금을 훔치기도 한 눈엣가시 조커와 손을 잡게 되는데요. 그동안 경찰과 검찰이 사법권 바깥에 있는 배트맨을 등에 업고 있었다면, 음지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온 마피아 세력이 경찰도 배트맨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 구는 천둥벌거숭이 조커와 손을 잡게 된 셈이죠. 이렇게 선과 악의 힘이 대등한 상태로 서로 대립하게 되는 선악 대립 구도가 형성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린 중심 갈등 구도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주인공인 배트맨, 브루스 웨인을 짚어볼까요? 배트맨은 다른 수퍼 히어로들과는 다르게 초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지요. 어마어마한 재력가이지만 어릴 적 밤거리에서 건달들에게 부모를 잃어 심리적 결핍이 있습니다. 이런 설정이 관객으로부터 연민과 동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현재는 배트맨으로서도 고담시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즉 브루스 웨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한 ‘우리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명망과 번영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 있는 듯합니다. 조커는 그런 그를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더욱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배트맨의 명예에는 금이 가고, 연모하던 여인 레이첼이 죽고, 고담시의 ‘백기사’ 하비 덴트는 증오심에 가득 찬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그저 좋은 일을 하고자 했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조커는 결국 패배하게 되지만, 배트맨은 더욱더 깊은 음지에 숨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브루스 웨인이 끊임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며 연민을 자극하는 구도입니다. 반면 <다크 나이트>에는 <올드 보이>와는 다르게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가 없습니다. 배트맨을 괴롭히는 조커의 개인사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조커가 왜 그렇게 배트맨을 못살게 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오늘은 스토리텔링의 기본 원리를 조금 더 원론적으로 살펴보고, 그 원론적인 내용을 명작 영화들에 적용시켜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갈등’과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