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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코치 Mar 31. 2021

봉준호가 <설국열차>에서 보여준 탄탄한 기본기

갈등을 중심으로

<기생충>의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봉준호 감독은 명실공히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해외의 일반 대중들에게 봉준호 감독의 인지도를 높인 작품은 <설국열차>일 것입니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시리즈물로 제작되기도 했지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설국열차>의 세부적인 설정들을 파헤치고 설명해왔습니다. 왜 앞칸의 사람들이 꼬리칸 사람들을 몰살시키지 않았는지, 기차의 생태계는 어떤 질서를 바탕으로 유지되는지 … 뭐 이런 것들을 더듬어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주 복잡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나리오의 측면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승리호> 분석과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읽고 나면 <설국열차>의 전체 내용이 외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신 후 다시 오시는 걸 권하겠습니다.


<설국열차>는 크게 네 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승리호>와 마찬가지로 <설국열차> 역시 첫 번째와 두 번째 스테이지가 전반부, 세 번째와 네 번째 스테이지가 후반부를 이룹니다. 그리고 두 번째 스테이지와 세 번째 스테이지의 경계는 영화의 절반인 한 시간 즈음 입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은 감옥칸까지 가고자 합니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첫번째 스테이지에서 섭외한 남궁민수의 힘을 빌려 열차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급수칸까지 진입하려고 하고,

세 번째 스테이지는 커티스 일행이 기차의 수장 윌포드가 있는 엔진실 앞까지는 가는 과정,

네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엔진실에서 커티스가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구도가

펼쳐집니다.


이때 이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면 안 됩니다. 여러차례 말씀드렸던 것처럼 드라마의 주인공은 더 힘든 곤경,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따라서 매 스테이지마다 주인공의 할 일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곤경, 시련, 장애물 등을 시나리오 용어로 갈등이라고 부릅니다. 인물들이 이러한 부침을 겪어야 관객들이 인물들에게 집중하고 감정이입을 합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꼬리칸 사람들이 경비대 몰래 파성추(?)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보초들이 들이닥칩니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도끼로 무장한 전투부대가 급수칸에 진입하려는 꼬리칸 사람들 앞을 가로막습니다. 여기서 피튀기는 전투가 벌어지고 이 전투를 거치는 동안 많은 꼬리칸 사람들이 죽거나 다칩니다. 그리고 커티스는 딜레마에 놓입니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더 밀어붙여 제일 앞 칸까지 갈 것인가?

세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경비대로부터 기습적인 총격을 받고 프랑코라는 강력한 경비대 간부가 커티스 일행을 몰살 직전까지 몰아붙입니다.

네 번째 스테이지에서는 커티스가 윌포드의 제안 앞에 무너져내립니다.

구조가 보이시나요?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각 스테이지마다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이 있고, 이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끊임없이 배치됩니다. 이 장애물들은 금방이라도 주인공의 할 일을 무산시킬 것처럼 단단하고 거셉니다.


이는 드라마 스토리텔링에서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구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설국열차>가 기차라는 설정 때문에 뻔하다 싶을 정도로 전형적인 구조를 띈다는 점입니다. 종착점에는 ‘끝판왕’이 기다리고 있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마다 더 강한 적들, 장애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게임에서도 흔히 보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스테이지마다 주인공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사실 및 정보들을 알게 되고, 이 새로운 앎은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기로 작용합니다. 두 번째 스테이지 끄트머리에서 이들이 어렵게 확보한 급수칸이 무용한 고지임이 밝혀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꼬리칸 사람들은 급수칸이 물이 공급되는 곳이니까 급수칸을 확보하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될 거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질로 잡은 메이슨으로부터 급수칸은 물을 분배하는 기능만 할 뿐이고 물이 만들어지는 곳은 머리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커티스 일행은 머리칸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기차 칸이라는 명백한 스테이지, 스테이지마다 설정되는 목적과 장애물, 그리고 새로운 정보가 주어짐으로써 확장된 시야가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게 만드는 동기로 작용한다. 너무나 전형적인 구성이지만 <설국열차>는 이 전형적인 구성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갈등입니다. 커티스와 꼬리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타개하고 싶다. 이것이 주인공이 처한 곤경입니다. 그래서 머리칸까지 가 윌포드를 만나야 한다. 이것이 주인공의 욕구와 할 일입니다. 칸을 거슬러 머리칸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이 거슬러가는 행군을 강력한 적들이 가로막는다. 이것이 갈등이겠지요. 드라마 스토리텔링에서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구조를 너무나 전형적인 모습으로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국열차>는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공부하고자 할 때 그 원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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