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은 억지로 짜 내야 생기는 거라구.
직장에서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정말 끝도 없이 일이 쏟아진다. 캘린더에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 한 업무가 끝날 때마다 도장 깨기처럼 빨간 줄을 그어본다.
‘이것만 다 하면 돼. 이제 2개 남았어.’
마음을 다시 다져보고 다시 업무를 시작해 본다. 내부 문서를 작성하고 회의를 준비한다. 잠시 얼음! 점심시간이면 잠시 사무실 밖에 나가 식사를 해야 한다. 커피까지 테이크아웃으로 들고 들어오면 다시 얼음 땡! 하고 업무로 복귀한다. 캘린더에 적힌 업무에 모두 빨간 줄을 긋고 나면 퇴근 시간 언저리이다. 오늘 하루도 정말 쉼 없이 일했다.
이상한 날이었다. 분명 캘린더에 할 일을 적어야 하는데 할 일이 없었다. 여유라는 것이 생긴 날이다. 출근은 했지만 해야 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다가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뭐라도 적어보고 싶어서 펜을 들었지만, 펜 잉크가 마를 때까지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일이 많다고 조금만 힘을 내서 일을 하자 마음먹던 그 순간이 약간 그리웠다. 바쁘다고 툴툴대면서도 할 일을 빨간색으로 긋는 그 행위가 좋았던 것이다.
점심시간에만 잠시 업무를 멈췄던 삶이다. 캘린더에만 적지 않았을 뿐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업무 연장선으로 보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혹시 점심시간뿐만 아니라 평상시 업무 시간에도 잠시 ‘얼음!’을 외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은 멈출 수 없기에 본능적으로 퇴근 시간에 맞춰 업무를 해 나가고 또 끝낸 것일 수도 있다. 한 번은 다이어트를 명목으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챙겨 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00 씨, 식사 가요.”
감사하게도 점심시간이면 내 식사를 챙겨주는 동료가 있다.
“도시락 싸 왔어요.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직장 어딘가 비어있는 공간에 들어가 도시락을 펼쳤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점심시간을 가졌다. 가끔 누군가가 도시락을 들고 들어오면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다음에는 다른 장소를 찾긴 했다. 어느 날은 도시락을 챙기기가 귀찮아서 대충 아무거나 먹으며 점심시간을 때웠다. 가끔은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쭉 하다가 식사를 넘기는 일도 생겼다. 점심시간은 업무를 멈추는 유일한 시간이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저 워커홀릭처럼 사무실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일을 더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마우스 커서는 모니터 안에서 목적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쉬는 시간은 내가 굳이 일상 중 한 타임에 짬을 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에서는 지속적으로 업무를 찾아 헤매지만 집에서는 또 집안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점심시간이 있어 업무를 멈출 수 있듯이 강제적으로 쉬는 시간을 만들어야만 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체 쉬는 것도 할 줄 모르면서 칼퇴와 워라밸은 왜 이렇게 추구하고 사는 건지 모른다. 대세를 따라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대세는 일과 휴식을 분명히 갈라서 사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냥 쉬지 않고 주어진 일을 계속하는 게 편한 사람일 걸까. 그래도 요즘 사람이라 그런지 그렇게 인정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바뀌어야 한다.
쉬는 방법을 알고 싶다.
쉬는 시간을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자꾸만 업무, 집안일 생각에 휩싸인다.
역시 아직 멀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