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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30. 2021

우주선은 사랑을 싣고

<승리호>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승리호>를 보면서 여러 작품들이 떠올랐다. 우주의 낙원이라 불리는 UTS와 계급에 따라 시민과 비시민으로 나뉘어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설정은 닐 블롬캠프의 <엘리시움>이 연상됐고, 선원들의 콘셉트나 우주선 내부는 제임스 건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와타나베 신이치로의 <카우보이 비밥>, 그리고 우주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스케일의 추격전은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였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승리호>는 한국영화 최초의 우주 SF 영화이기에 과거 한국영화를 레퍼런스로 삼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의 과거는 미국 영화이거나 유럽 영화이거나 일본 영화"라고 한 허문영 평론가의 말처럼 <승리호>는 할리우드 SF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은연중에 불러온다.


그리하여 탄생한 <승리호>는 꽤나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환상적인 CG로 완성된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이나 UTS 및 비시민 거주지, 그리고 우주선의 모습은 내가 진정 한국영화를 보는 게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잘 구현됐다. 영화 초반, 지구에서 위성궤도에 위치한 UTS로 향하는 시퀀스나 승리호의 첫 등장 시퀀스, 후반부 우주 추격전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분명 이 시퀀스들은 조성희가 관객들로 하여금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을 제대로 활용한 예다. 그 외에도 '승리호'가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UTS의 수장 설리번(리처드 아미티지)은 그토록 증오하는 지구인들과 위선적인 인물들을 쓰레기 취급하며 이들을 소멸(청소)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정작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에게 당하게 되는데, 오히려 설리번이 청소의 대상인 '쓰레기'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과 같다. 이는 영화가 내포한 연대와 사랑의 메시지와도 부합한다.


하지만 <승리호>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개운하다거나, 만족스러웠다거나,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극장에서 보지 못해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 탓이었다. <승리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캐릭터와 각본이다. 이는 너무나 치명적이라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마냥 <승리호>를 애정만 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캐릭터가 발목을 잡다

먼저, 캐릭터 이야기를 해보자. <승리호>에는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선원들이 있다. 조종사 태호(송중기)와 승리호를 이끄는 장 선장(김태리), 살림꾼이자 기관사 타이거 박(진선규), 그리고 작살잡이 안드로이드 로봇 업동이(유해진). 이 중 장 선장은 왜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지 납득이 쉽게 되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은 주인공이 된 명확한 이유가 있다. 태호는 천재 조종사라는 점, 타이거 박은 다소 얄팍해 보이긴 해도 기관사 역할을 충실히 한다. 업동이는 작살잡이로서 꽤나 활약을 한다. 그런데 장 선장은? 장 선장은 어느 부분이 특히나 뛰어난 걸까. 과거 장 선장은 우주 해적단을 이끌며 설리번을 눈앞에서 죽일 뻔했다. 이는 도대체 어떠한 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단 말인가. 뛰어난 리더십?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술 실력?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단순히 선장이고, 쿨해 보인다는 착각만 심어줄 뿐이다. 이와 비슷한 인물로 <반도>의 서 대위(구교환)가 있다. 매력적인 배우가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 어떻게 서 대위가 광기에 사로잡힌 군인들을 통치할 수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외에도 승리호 선원들의 결속력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보자. 이들이 뭉친 이유는 각자가 루저이고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각자에게 화가 나도 이들이 뭉친 이유는 그 결여를 메꾸고 루저라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서로에 대한 공감대로 결속력을 견고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승리호 선원들에게 결여는 무엇인가. 왜 이들이 뭉쳐있어야 하는가. 이 의문에 대해 영화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승리호 선원들과 꽃님이가 만난 후의 에피소드도 어딘가 이상하다. 나는 아직까지 선원들이 꽃님이를 지극정성으로 예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단순히 귀여워서인가, 아니면 선원들의 그림을 그려줘서인가. 이들이 함께 있던 순간은 너무 짧다. 그 순간에 이렇게까지 끈끈하게 지낼 수 있던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나마 태호는 과거 자신이 잃어버린 딸이 연상된다고는 하지만, 다른 선원들은 어떤 이유로 꽃님이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걸까. 특히 타이거 박은 상당히 심각하다. 그는 지구에서 마약 갱단의 두목이었다. 온갖 더러운 범죄는 다 저지른 이가 설리번의 돈이 '더러운 돈'이라며 거부하고 꽃님이를 어떻게든 구하려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계기로 그가 개과천선을 했고 선한 일을 하려는지 설명은 없다. 이렇듯 캐릭터 간 부실한 설정과 결여된 설명은 영화의 몰입감을 해치고 캐릭터를 평면적이게 만든다. 이는 과거 살육 기계였던 업동이가 이토록 순해진 이유의 결여나 외국 배우들의 연기,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꽃님이의 능력 같은 문제점들은 그냥 넘어갈 만큼 심각하다.


새로운 시도가 무색해지는 진부한 이야기

또 다른 문제점은 앞서 말했듯 각본이다. <승리호>는 익숙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에서도 부성애를 특히나 강조하고, 이에 대한 감정적인 격정을 불러일으킨다. <승리호>를 혹평하는 측에서는 이 영화마저 신파 투성이라고 비판하지만 나는 신파가 심각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신과 함께> 시리즈나 <백두산>에서 보여준 신파보다 훨씬 양호하며 불편함이 덜하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건 새로운 도전에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있다. <엑시트>처럼 목적을 향해 시원하게 질주해야 할 영화에 태호의 부성애, 꽃님이의 귀여움을 강조하고, 억지로 웃음을 요구하는 장면들이 끼워지니 제대로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단편영화 <남매의 집>을 연출한 조성희의 파격적인 면모와 신선함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한국영화로서 처음 시도하는 우주 배경 SF 영화이기도 하고, 스페이스 오페라가 한국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위험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많은 관객들의 감정을 사로잡기 위해 부성애와 귀여운 아이, 덜 폭력적인 액션으로 채운 것으로 보인다. 이해는 가지만 쉽게 가려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동시에 이런 의문도 저절로 가질 수밖에 없다. '또 이런 이야기를 할 거면 굳이 SF 장르여야 했나'. 익숙한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장르여야만 하는 당위성이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이는 윤성현의 <사냥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사냥의 시간>은 디스토피아로 변한 미래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영화는 꼭 디스토피아 장르여야만 했던 이유를 관객에게 납득시켜주지 않는다. 그리고 클리셰의 길만을 따라간다는 점 역시 닮아 있다. 결국 <승리호>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만 남았다.


 <승리호>는 <사냥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대범함이 보이는 지점이 있고, 한국영화가 시도하지 않은 지점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위대한 도약을 위한 미약한 발걸음쯤으로 여길 수 있겠다. 하지만 아쉬움이 더 짙은 영화이다. 새로운 시도만으로 찬사 받아야 할 시대는 지났다. 조성희 감독의 행보와 새로운 장르를 향한 도전을 응원하겠지만, 또 이런 작품이 나온다면 더 이상 면죄부를 주는 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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