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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스콘 Nov 07. 2023

하야오와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해석 3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뒤틀린 소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 1부에 이어 2부에서는 이세계로 형상화된 소년의 무의식과 트라우마 회복을 이야기했다. 시대의 폭력에 망가져 간 소년은 무의식으로의 여정을 통해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어살>이 이전 지브리 영화와 결이 다르면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성숙한 영화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어살> 리뷰 3부에서는 이세계를 통해 드러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삶에 대한 생각 등을 다루면서 길었던 <그어살> 리뷰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부조리 속 죽음과 탄생

우리는 다시 이세계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 이세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마히토가 처음 이세계로 떨어지고 난 후 펼쳐진 풍경은 고인돌이 있는 한 섬이다. 이 섬은 노골적으로 아놀드 뵈클린의 <죽음의 섬>(The Isle of the Dead)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젊은 모습의 키리코가 한 말. “이곳은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아”. 이후 <붉은 돼지> 속 비행기의 대열을 떠오르게 하는 배들의 환상과 물고기를 얻기 위해 기다리는 망자들, 먹히는 와라와라, 죽어가는 펠리컨 등 곳곳에 퍼져 있는 죽음의 이미지들을 목격한다.


이전 글에서 이세계는 마히토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공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트라우마가 있었고 이세계 여정을 통해 어머니와 새어머니를 만나면서 서서히 회복한다. 이를 고려하면 이세계 속 죽음의 풍경과 여러 상징은 마히토의 트라우마, 무의식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트라우마는 어머니를 상실하게 만든 전쟁, 끔찍한 현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과 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있는 마히토의 무의식에서는 죽음의 이미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죽음의 섬>은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즉, 이세계는 죽은 자가 더 많은 죽음의 세계에 가깝다.


하지만 그 반대도 존재한다. 와라와라가 그 예시다. 와라와라는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가 태어난다. 와라와라는 인간으로 탄생하기 이전의 존재인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의 코다마를 닮았지만 오히려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의 영혼들을 더 닮았다. 흥미로운 건 <소울>의 영혼이 태어나기 위해 지구로 하강한다면, <그어살>의 와라와라는 태어나기 위해 지상으로 상승한다는 점이다.


펠리컨도 비슷한 맥락이다. 죽어가는 펠리컨에게 마히토는 와라와라를 먹으니까 이런 꼴을 당한다며 일갈한다. 그러자 펠리컨은 자신의 일족은 와라와라를 먹기 위해 존재하며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고 한탄한다. 와라와라를 먹는 펠리컨들도 결국 '생존'을 위한 것이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와라와라를 먹어야만 한다. 죽음의 이미지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탄생과 죽음은 순환한다. 그리고 부득이하게 이곳에 남겨져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의 절규도 담겨 있다. 이곳은 부조리의 세계다. 서로 죽고 죽이며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하는, 마히토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탑과 이세계라는 근대

<그어살>을 둘러싼 여러 비평과 해석에서는 탑과 이세계가 지브리, 또는 애니메이션 업계를 의미한다고 나온다. 일리 있고 흥미로운 해석이다.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가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 왜가리는 자신, 그리고 큰할아버지는 다카하타 이사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 만큼 그러한 해석은 힘이 실린다.


하지만 이것은 정답이라고 볼 수 없다. 스즈키 토시오의 설명은 영화를 따라가는 하나의 명확한 길을 알려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저택의 할머니가 설명해 준 바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이 있기 조금 전 하늘에서 커다란 바위가 떨어졌고 큰할아버지(히노 쇼헤이)가 그것을 건물로 지어 지금의 탑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커다란 바위는 우주에서 온 운석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석은 미지에서 온 새로운 것으로 새로운 문물, 사상, 계몽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따라서 탑과 탑의 세계는 근대화가 진행 중인 세계다.


물론 마히토가 살고 있는 근대(현실)와 큰할아버지의 근대(이세계)가 완전히 똑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이세계에는 현실과 달리 매혹적이면서 판타지적인 풍경들이 있고,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목적과는 달리 이세계에는 죽음과 부조리가 만연하다. 큰할아버지가 데려온 펠리컨은 인간이 되길 기다리는 와라와라를 잡아먹고 히미에 의해 불에 타 죽는 신세이며 그 탓에 이곳을 ‘저주받은 바다’라 부른다.


또 다른 존재인 앵무새는 세력을 확장하여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하나의 왕국까지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때 앵무새 대왕(쿠니무라 준)과 그를 따르는 군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혹은 나치 독일을 떠오르게 한다. 근대는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던가. 인간의 이성이 진보와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켜 근대에 막이 내리지 않았는가.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전처럼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세계도 결국에는 앵무새 대왕의 탐욕, 악의로 인해 멸망하고 만다. 그렇게 탑은 무너지고 마히토의 현실에서도 전쟁이 끝난다. 근대의 종언이다.


하야오, 하야오를 만나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바랐지만 우리가 목격한 건 부조리한 세계였고, 새로운 근대화를 이룩하고자 했지만 현실의 근대를 불러올 뿐이었다. 몹시 똑똑한 인물이던 큰할아버지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주위에는 누구도 없었고 홀로 후계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위태로운 나날을 보낼 뿐이었다. 과연 큰할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일까. 스즈키 토시오의 말처럼 다카하타 이사오를 불러온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근대를 멸망으로 이끈 기성세대,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지 못한 실패한 인물, 존경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 미야자키 하야오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마히토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큰할아버지까지 미야자키 하야오란 말인가. 1부에서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말 못 한 부끄러움을 드러내고자 <그어살>을 만들었다고 한 바 있다. 그의 부끄러움은 실제 자기 모습, 생각과 괴리가 있는 인물과 작품을 만들어 온 것이다. 마히토라는 뒤틀린 소년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은 이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명이 더 나와야 한다.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모순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숨겨온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 말이다. 즉, <그어살>은 마히토라는 어린 미야자키의 무의식과 큰할아버지라는 지금의 미야자키의 무의식이 합쳐진 세계이며 어린 미야자키가 지금의 미야자키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이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 것을 부탁한다. 마히토는 무엇이 다르기에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갖춘 것일까. 단순히 같은 피가 흐른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마히토는 탑에 쓰일 조각이 나무조각인지, 악의가 깃든 조각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는 마히토가 이세계 여정을 통해 한층 더 성장했음을 증명한다.


잠시 왜가리와의 에피소드를 돌이켜보자. 마히토는 왜가리에 대한 경계심으로 목검을 휘두르고 칼로 대나무 활과 화살을 만들어 공격한다. 결국 화살은 왜가리의 부리를 관통하며 구멍을 낸다. 이후 이세계에서 왜가리는 자신의 부리에 난 구멍을 막아야 다시 왜가리로 변신해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마히토는 칼로 나무를 깎아 부리에 난 구멍을 막아준다. 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구멍을 낸 것에서, 칼로 막대기를 깎아 구멍을 막아준 것으로 바뀌는 것. 동시에 악의에서 선의로 바뀌는 여정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칼은 쥔 사람이 악의를 가졌는지, 선의를 가졌는지에 따라 구멍을 낼 수도, 구멍을 메꿔줄 수도 있다. 이것을 깨달았기에 마히토는 후계자가 될 자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이세계에 남아 탑을 쌓기를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난 흉터를 만지며 “이 흉터는 제가 만들었어요. 제 악의의 상징이죠.”라며 돌을 만지길 거부한다. 그것이 악의가 깃든 돌이 아닌 순수한 돌이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돌을 놓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탑을 쌓는지가 탑의 재료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결국 마히토는 이세계에 남지 않고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이상으로의 도피가 아닌 현실 직시가 훨씬 중요하며 2부에서 다룬 트라우마의 인정도 결국 직시에 의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설령 현실이 큰할아버지의 말처럼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세상이어도 마히토는 복귀하고자 한다. 대신 히미, 키리코, 왜가리 같은 친구를 만들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이 다짐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순수한 개개인이 모여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 아니던가. 나는 이 일을 왜 시작했는가, 나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 나는 어떻게 이 일을 일궈 왔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바라보며(돌이켜보며) 하나씩 묻고 답한다. 마히토의 결정에서 감정의 격정이 일어난 건 이러한 문답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 신념인 ‘세상을 바꾸겠다는 마음가짐’을 처음 다짐하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82세의 감독은 친구를 만들고 지금, 여기에서 나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그려나가기로 결정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대들은 어떤 탑을 쌓을 것인가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이세계에서 탈출한 마히토는 새어머니, 왜가리와 함께 원래 살던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탑은 무너진다. 몇 년 후, 동생이 태어나고 전쟁이 끝난다. 마히토는 도쿄로 돌아간다. 새삼 <그어살>에서는 푸른 하늘이 온전히 나오지 않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마히토가 살고 있는 어리석은 세계에서도, 이상적인 공간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위태로운 세계였던 이세계에서도 푸른 하늘은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엔딩 크레딧의 푸른 화면이 바로 푸른 하늘이라는걸. 일련의 여정을 통해 성장한 마히토가 친구를 만들고 함께 이상향을 그려가며 세상을 바꿀 거라는 각오가 바로 이 푸른 화면의 엔딩 크레딧에 담긴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의 끝에서 이 일을 처음 시작하기로 다짐했음을 드러냈다. 바로 지브리의 색깔이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만들고자 했던 순수함의 색깔을.


즉, <그어살>은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를 바라봄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정이면서 악의가 선의로 바뀌고, 죽음(어머니)에서 탄생(동생)으로 끝나고,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푸른 엔딩 크레딧으로 마무리되는 여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쌓아 올린 탑과 살아온 궤적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걸 보고 있는 그대들은 어떤 탑을 쌓을 것인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묻는다. 이는 단순히 교조적인 설파가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과 복잡한 내면, 모순을 충만한 정서의 이미지들로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다가가려 한 시도다. 누군가는 이러한 방식이 난해하다며 난색을 표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이미지들이 일으킨 격랑에 압도되고 말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 시절을 투영한 마히토, 그리고 이제 모험을 시작하게 될 관객을 향한 응원과 긍정의 시선을 보낸다. 친구를 만들고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이상이 아닌 현실에서 자신의 할 일을 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그렇게 성장했다. 여전히 흉터는 남아 있겠지만 그 흉터가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힘겹고 두려울지라도 그것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에 대한 체념의 태도도 느껴진다. 비범했지만 결국 무너져 내린 세계에서 사라진 큰할아버지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세계에서의 기억을 잊고 평소처럼 살아가게 될 거라고 단언한 왜가리의 말처럼 사람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를 잊어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이 현실에서 너만의 탑을 쌓아가면 되니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체념 섞인 말에 마냥 긍정만 하진 못할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마히토는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긴다. 이때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잠시 바라보다 주머니에 넣은 후 문을 열고 나간다. 마히토는 탑에서 가져온 돌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미약하게나마 힘이 깃들어 있는 돌을 가지고 다니며 이세계에서의 모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에는 잊히지 않는 것도 있다. 이 영화를 비롯한 지브리의 영화들과 미야자키 하야오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흘러 약해지더라도 그 아름다움과 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대답하고자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금, 여기에서 간절히 묻는 질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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