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초야 Jun 19. 2024

푸켓에서 만난 질문

햇살과 얼음

 칼로스는 7월의 햇살 같은 친구였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쉼 없이 농담을 뱉어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도 웃을 정도였다. 칼로스는 몇 년 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도련님이었다.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칼로스의 인생에는 돈과 시간에 대한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로워 보이는 그의 육신 아래에는 공허가 깔려있었다. 물질적 풍요가 충족된 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공허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핀은 1월의 아침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핀의 눈동자는 ‘얼어버린 호수’처럼 파랗고 맑았으며 고요했다. 영어가 서툴렀던 나는 무리 중 말수가 제일 없는 ‘핀’의 옆에 앉아 고요함을 즐겼다. 가끔 정적을 깨고 핀과 나눈 대화는 핀처럼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얼어버린 호수 아래에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는 기분. 그런 핀의 시간에는 커다란 제약이 있었다. 핀은 시간이 갈 수 록 말라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지금 것 살아온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칼로스와 핀도 나처럼 푸켓에서 처음 만난 사이었다. 우리가 다 같이 야오야이섬으로 놀러 간 날, 칼로스와 핀만이 그 섬에 남아 밤바다를 즐겼다. 그날 이후로 그 둘은 푸켓을 떠나는 날까지 모든 시간을 붙어 다녔다. 칼로스는 핀에게 방콕에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핀은 칼로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닐라로 향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칼로스는 핀과 있던 그 날밤 처음으로 신비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던 핀은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었다. 햇살 같은 칼로스의 밤은 누구보다 어두웠고, 핀의 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푸켓에서의 마지막날, 칼로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28인치 캐리어를 들고 택시를 탔다. 곧이어 핀도 호텔을 떠났다. 핀의 짐은 오토바이 시트 아래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백팩이 다였다. 바이크조끼를 입은 핀은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호리호리한 체형 때문에 바이크 조끼가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 같았다. 나는 떠나는 핀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칼로스와 핀이 서로에게 솔직해지기 바라면서. 핀이 10년 뒤에도 살아있길 바라면서.


 자기 계발서에서 가장 흔한 질문을 2가지 꼽아보면, 하나는 '내가 지금 억만장자라면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이고, 두 번째는 '내가 5년 뒤 또는 1년 뒤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이다. 이 두 가지 질문이 마치 칼로스와 핀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듯했다. 햇살처럼 돈이 영원이 존재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얼음처럼 삶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모든 친구들이 떠난 호텔은 적막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질문들이 길을 잃어버린 나를 들쑤셨다. 진실과 공허에 두려움을 느낀 나는 결국 다른 지역의 호텔로 도망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