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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영 Nov 16. 2021

소비의 기쁨과 슬픔.

어찌되었건 뭐라도 쓰는 생활.

인테리어 의뢰를 해야 할 일이 생겨서 소개를 받아 인테리어 사무실에 방문했다. 처음 견적을 듣고 아아, 역시 날 호구로 보았구나 싶었지만 알아보니 내가 생각한 견적으로 내가 기대한 만큼의 수리를 하는 건 애저녁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호구라기보다는 멍청이에 가까웠다. 읔. 결국 이러나저러나 거금을 들이는 것이라면 아주 맘에 들게 하는 게 나은 것이니 더욱 거금을 써보자라는 굉장한 결론이 났다. 생각에 생각을 거쳐 결정한 일이 처음 생각한 것과 심각하게 다르다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결론이 났는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스스로는 꽤나 합리적인 결정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신비롭다. 신비롭다는 말로 비합리적 결론을 회피하려는 생각은 정말이지 아니다. 아무튼 생각해보면 의류학을 전공하고 세무사를 하고 있는 내 인생 자체가 당초와는 심각하게 다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유독 내 인생에서만 그런 건지 다른 이들도 이 정도의 삼천포행은 종종 일어나는 일인 것이며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이런 식인지 궁금하다.


아무튼 거금과 거금이 합쳐져 더욱 큰 거금을 쓰게 된 이유는 인테리어 실장님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라고 그럴싸하게 적었지만 결국 돈 버는 직업으로 가진 일 이외에는 꼼꼼히 비교하고 선택하는 일에 몹시나 귀찮음을 느끼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취향은 명확하여 맘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해 결국엔 울면서(..) 이것저것 알아보게 된다. 다만 실장님이 보여준 시안이나 제안해 준 자재들의 색감이나 조합이 정말이지 딱히 불만할 만한 것이 없고 그냥 아,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라는 수준이라 나는 내가 이렇게나 무던한 사람이 되었는가에 대해 꽤나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어째서) 생각했는데 그냥 그녀와 내가 취향이 몹시나 맞았던 것뿐이었다. 무던하다는 단어는 뭐랄까. 다가가고 싶지만 갈수록 자석의 반대극처럼 나를 웅, 웅, 하면서 밀어낸다. 어딜 감히. 불면증에 고통받는 주제에. 하면서.


취향도 비슷하고 이래저래 대화에 온화한 공기가 떠다니게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 나는 꽤나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가 말하는 동안 울리는 아주 고오급진 키보드 소리가. 키보드의 색감이. 저건 무엇이지. 저 키보드는 무엇이기에 저런 소리와 저런 색을 갖고 있는 것이지.


실장님 대관절 그 키보드는 무엇인가요.

아, 이거 선물 받았는데 예쁘죠. 한 번 써보세요.

ㅇ ㅏ. 남편 이거 되게 예쁘다. 되게 조용하다. 되게 좋다.....


이런 날 보고 남편은 나라는 사람이 결국 기승전 소비, 기승소비, 기소비, 뭐 이런 식의 알고리즘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에둘러했으나 그 또한 나의 남편으로 살아온 게 벌써 8년 차라 그녀가 쓰고 있는 키보드의 모델명을 알아보고 있더랬다.


그래서 기승전소비가 되어 이 키보드는 무려 1달이 넘게 재입고를 기다려 받은 것으로써, 타자 치는 내내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무언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북을 하나 만들면서 나 같은 쪼랩 인생은 글 쓰는 일은 할 수 없겠구나 깨달은 게 고작 한 달 전인데 인테리어를 하러 가서 키보드를 사서 글을 써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다니. 사람 사는 게 원래 다 이런 식, 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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