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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Apr 25. 2024

어느 정주영병 환자에 대하여

어떤 병은 그 자신을 넘어 가족과 주변인과, 혹은 그저 그의 말을 듣기만 하던 제3자까지 병들게 한다. 어떤 정주영병 환자에 대하여.

은행원의 인생은 마치 뽑기와 같다. 옆직원과 나는 동시에 호번을 하고, "띵동"하면 저멀리서 고객이 걸어오는데 정상인이 걸어올지, 비정상인이 걸어올지 알수가 없다.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딱 잘라 나눌수는 없지만, 손님은 "쉬운손님", "어려운 손님" 혹은 "좋은 손님" "나쁜 손님", "정상인 손님" "비정상인 손님"으로 나누기는 쉬운 법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판단은 오래도 걸리지 않는다.

항상 확률은 1/2, 좋은손님만 세번 걸리는 것도 확률상 1/8, 나쁜손님만 세번 걸리는 것도 1/8

이날은 나에게 정상인이 세명, 내 옆 선배님께 비정상인지 세명 다녀갔다. 역시 어쩌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 운의 연속일지 모른다.

그 중 이 정주영병 환자는 꽤나 오래남을 레전드였는데, 그의 흔적은 깊고, 여운은 짙었다. 좋지 않은 기억은 잊는게 승리 일지 모르지만, 기어코 그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기는 것은 정말 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어떤 기억들은 정말 쓰고 싶을 뿐이다.

앉자마자, 아니 앉으면서 였나, ”내가 ㅇㅇ은행을 30년 거래했는데“ 마치 모든 어린이용 동화가 "옛날옛적에"로 시작하듯이, 모든 공식석상의 인사가 "ladies and gentle men"으로 시작하듯이, 이건 마치 약속의 말이다. 소설 설국을 떠올리면 '국경의 긴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라는 첫구절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들을 떠올리면 항상 xx년 거래했다는 멘트가 떠올랐다.

역시나 조회해보니 그가 가진 가장 오래된 통장(해지한 통장 포함)의 개설일은 2010년 이후였다. 그들은 시간을 빨리달리기라도 하는 걸까, 역시 그들에게는 많은 능력이 있다. 아니면 산수를 하지 못하는 걸까. 시작부터 내 예상은 틀림이 없었고, 실망 또한 없었다.

평균 수명 80세 시대에 만만한게 30년인지 그분들께서 맨날 30년을 무슨 고유명사처럼 들고오시는데, 평균연령 100세가 되면 아마 그분들은 ”반백년 거래했는데“로 시작할것 같다. 어휴 그때는 내가 여기 없어야 할텐데.


30년 거래했지만, 대출을 받기는 처음이고 자기가 원래 대출같은건 안쓰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30년 안쓰셨으면 이대로 쭉 쓰지 마시고 가던길을 가시지 왜 여기에 이렇게 왕림하신건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2억짜리 집을 사야하는데, 1억 9천을 대출해 달라고 했다. 흠 대출이 매매가의 95%군. 그냥 2억짜리 집사는데 2억을 대출해달라고 하면 어떠했을까. 차라리 설명이 쉬웟을것 같기도 했다.

007 카지노로얄에서 베스파린드가 엘레베이터에 따라 타려던 제임스 본드에게 말했었다. "다음걸 타세요. 당신의 자만심이 탈 자리가 없네요" 매매가의 95%가 대출인 아파트에 내 발바닥 두짝 머물 공간이, 아니 한짝조차 들어갈 공간이 없을것 같은데, 숨조차 쉬지 못할것 같은데. 무슨용기로 95% 대출을 원하시는걸까.

"매매가의 95%를 대출해 드릴수는 없어요" 여기서 LTV니 DTI 라던지 등의 단어는 사치다.

“한국사람들은 이게 문제야 해보기도 전에 안된다고해”

그렇다 ! 그는 정주영병 환자였던 것이다. 순간 나는 서류를 쓰고 계시던 내 앞 손님의 눈치를 한번 살핀후에 허리를 살짝 펴서 칸막이 넘어, 환생하신 정주영 회장님의 용안을 뵈었다. 그네 뛰던 춘향이 얼굴을 몰래보던 이도령 마음이 이랬을까, 내 앞의 정상인 손님이 정상인것에 대하여 새삼 감사한 마음과 함께, 옆자리 손님이 내 앞에 앉지 않을것을 감사할 뿐이었다.

사실 옆자리 상담에 귀를 기울이고도, 약정서 설명 정도야 할수있다. 내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것은 잘 하지 못하지만, 앵무새 마냥 대출 약정서 내용을 읊어댄지 어언 5년이기 때문에, 약정서 설명 정도 쯤이야 한 귀는 다른쪽에 열어놓고 할수 있다. 어찌나 읊어댓는지, 어쩌면 입이 두개라면, 손님 두명을 앉혀놓고 동시에 두개의 대출을 설명할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순간 생각했다.

여튼 꽤 오랜시간동안 내 옆자리 선배님은 환생한 정주영 회장님께 지금은 회장님께서 예토전생 하시기 전에 살던 그 7080 대한민국이 아니고, 안되는건 안되는 거라는걸 정신줄을 붙잡고 설명하셨다.

이건 마치 1인 1음료를 주문해야 하고, 추가 컵 제공은 불가하다는 동네 개인 카페에 붙어있는 안내문 같은게 아니다. "30년 단골이었자나~ 좀 해줘봐~"가 안통한다고, 300년 거래했어도 안되는거라고...

여튼 회장님이 이 내용을 이해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작은거 다음에 큰거 오는법, 큰거 다음에는더 큰게 오는 법이다.

“그러면 신용으로 1억 9천만 해줘 딱 3달만 쓸거야” 그렇다 뭐피하려다가 뭐처맞는다는 옛말이 딱이다. 아니 이런 옛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감정이었다. 

“월소득이?” “2백” “회사 다니신지는?” “15일” "멋지다. 회장님!" 동은이 처럼 박수를 크게 치고 싶었다. 연봉 24백이신분께 신용대출 1억 9천. 멋지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1억이라는 돈을 가볍게 여겼나. 역시 회장님은 통이 크시다. 다만 그 통을 감당하는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 앞에 앉아있는 은행원이라는게 문제다.


“신용대출은 연봉을 넘어갈수 없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어! 대출한번 연체한적 없고, 신용점수가 935점인데 말이야!! 이렇게 신용이 좋은데 신용대출 1억이 안된다는 말이야?? 30년 거래 다 쓸데없고만 어!“

대출 30년 만에 처음 받으신다면서요 고객님… 대출을 받은적이 없으니 연체한적도 없다… 이건가 슈뢰딩거의 대출인걸까. 아니지 슈뢰딩거의 연체인건가… 

여하간 해보지도 않고 모든걸 안된다고 말해버린 2023년의 은행원은, 어찌저찌 정주영병 고객님을 고이 보냈다.

"30년 거래했는데 어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한단 말이야? 거래를 다 빼야겠어 어!! 거래 못하겟네!!"

우리는 안다. 거래 뺀다는 사람치고, 거래 빼는 사람을 못봤다는 것. 이건 마치 회사 때려쳐야겠네 하는 사람치고 회사 때려치는 사람이 없는것과 동일한 이치다.

아 참, 나는 떠나가는 회장님의 뒤통수에 ”아 8년 거래하셨자나요!!! 왜 자꾸 30년이라고 해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ps. 회장님이 내 옆창구에 앉아계시는 동안 내가 상담한 손님들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고 싶다. 상담은 열심히 했지만 나의 마음과 귀와 관심은 온통 옆자리의 그에게 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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