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인터뷰: 직장 편]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웃음이 난다. 참,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마음을 당겼을까.
2017년 4월. 보고와 야근, 쉼 없는 업무량으로 악명(?) 높은 P사로 이직한 덕분에, 그날도 어김없이 야근 파티(당시는 ‘야근 크리’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중이었다. 가물가물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회사는 매달 M+2까지의 판매계획을 영업, SM과 협의하여 S&OP 시스템에 입력해야 했는데, 퇴근 직전 겨우 원물 고구마 재고를 뺄 수 있는 할인행사를 걸기로 마무리가 되어 힘들지만 다행스런 마음으로 최종 수량을 입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 달 매출 목표에 맞춰 SKU별 수량 배분을 한창 하고 있는 와중, 뜻밖에 전 회사의 박 과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과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 때 8년 차 직속 대리님이시긴 했지만, 7개월 만에 파트가 달라져서 같은 팀이면서도 뭐 그닥 같은 팀 같지 않았던 그런 사이? 그래도 당시 마케팅 암흑기를 같이 보내기도 했고, 쫑 팀장의 독재를 바로 정면에서 막아주던 어벤져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듬직한 선배로 남아있는 분이었다.
“야, 잘 지내지? 거기서도 야근하냐?”
반가웠다. 이런 막역한 말투.
“오 과장님~ 잘 지내세요?? 저 야근하긴 하는데,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 일은 좀 할 만 해?”
“음... 좀 어려워요. 이것저것 시스템도 많고, 업무 스타일도 다르고. 뭐 적응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그래. 다른 건 아니고...”
느낌이 요상 꾸리 했다. 앗 이게 뭐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뭔가 곤란할 것 같은데...! 이상함을 감지한 채로 일시 정지되어버린 나에게, 과장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회사 다시 돌아올 생각 없어? 요즘 우리 회사 해외 잘 나가잖아. 해외로 올 생각 없나 해서.”
아, 역시나였다. 하지만 고민조차 하지 않고 1차 방어에 들어갔다.
“잉, 네? 제가 왜 돌아가요! 싫어요~~~ 저 여기 좋아요 과장님! 이것저것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알아~ 내가 널 모르냐. 여기서도 일 욕심 많고 했으니, 거기서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
“네 맞아요. 아직 이직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안다니까~~~ 너 어디서든 잘하고 열심히 하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돌아오자.”
둘러대선 먹히지도 않겠다 싶었다. 그래도 일단 좀 더 구체적인 2차 방어를 시도했다.
“으윽 왜 그러세요 과장님~~~ 저 여기 온 지 1년도 안됐어요!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나온 건데, 어떻게 돌아가요. 제품도 제대로 출시해보고 싶고, 이것저것 경험해보고 싶어요.”
정말 진심이었다. 그 회사를 돌아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그만두고 싶었는데. 얼마나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하고 싶었는데. 그간 얼마나 마음이 타고 시커메졌는데... 신입사원으로 S사에 입사 후 매일을 울었다. 대학교 경영학 공부를 했다는 애가, 나름 반짝반짝 빛나게 생각 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애가 혹독한 직장생활을 어찌할 바 몰라서 매일을 울었다. 그저 한 동안은, 학교에서는 왜 ‘좋은 리더’만 생각하게 하고, ‘안 좋은 리더’를 만났을 때 대처법 같은 건 고민하지 않게 한 건지 원망했더랬다. 유독 수평적인 분위기의 스타트업 BTL 대행사에서 인턴을 한 나에게, 사람들에게 친숙한 소비재를 만들겠다는 맑은 다짐으로 취업을 계획했던 나에게, 하필 설립 50년 넘은 보수의 끝판왕 제조회사라니...! 진짜 정말이지 내 계획에 이런 회사는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해외는 달라. 너도 알잖아. 사업 계속 벌이려고 하고 있고, 마투비도 내수처럼 못 쓰고 그렇지 않아. 할 게 너무 많은데, 마케터가 필요해. 사장님도 너 오래.”
“으... 과장님 진짜 저 여기 잘 적응하고 있어요...”
“안다니까~~ 그래 확인했어. 너 충분히 다른 데 가서도 적응 잘한다는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그만 친정으로 돌아오자. ”
“아 진짜 말이 안 돼요. 여기 저 믿고 뽑아주신 팀장님도 계신데, 1년도 안됐는데 그만둔다고 어떻게 말을 하겠어요...”
“그냥 잃어버린 엄마 찾았다고 해.”
계속 거절해봤자 답은 나지 않을 것 같아,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는 답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빈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쯤? 마케팅 암흑기를 함께했던 어벤져스 과장님들과 선배들과의 술 약속이 있었고,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가기 전, 박 과장님과 따로 봉구비어에 들러 청포도 맥주를 앞에 두고 얼마 전 그 ‘전화 건’에 대한 얘기를 마저 했다. 사실은 내심 만나서 속 시원히 얘기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나 카톡보다 얼굴 보고 직접 거절하는 것이 오해 없이 정중히 마무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달리 달아서 맛있었단 기억이 있다, 청포도 맥주. 그 청포도 맥주를 홀짝이며 1시간 넘도록 쭉 대화만 했던 것 같다. 왜 나를 선택했는지. 왜 나를 부르는지. 왜 내가 필요한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이 뭔지. 그리고 과장님이 해외로 차출되어 6층으로 올라간 후로 어떤 일이 있었고 현재 무슨 고민들이 있으신지. 과장님은 지금 누구와 일하고 있으며, 내가 간다면 누구와 일하게 될 것인지 등.
이것저것 많은 대화를 하면서 살짝 솔깃한 내용도 있었지만 웬만한 것들은 이성을 차리며 잘 넘어갔다. 하지만, 보다시피 결론이 결국 돌아간 거인 것처럼, (몹시 유감스럽게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 버리는 포인트를 피할 순 없었다.
‘내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더한, ‘내가 봐도 나 같은 역할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다’는 죽일 놈의 공감력.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솔직히 내가 그 역할을 너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망할 놈의 자신감.
과장님은 역시 영업 출신이 맞았다. 내가 어떤 포인트에서 동기부여가 되는 놈인지, 어디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놈인지 아주 잘 파악하고 계셨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순 없지만, 덜 닦고 나온 X이라도 있는 것 마냥 나는 왠지 S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또다시 나오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돌아가서, 사람에 지쳐, 상황에 지쳐 못 다했던 S사에서의 업무를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이제 남은 일은 2가지였다. 업무 적응 잘하고 있고 지난 주만 해도 등산모임에서 신나게 날아다닌 경력직 PM이 돌연 퇴사하겠다고 선언하는 일. 그리고 감정이 끌려서라는 이 말도 안 되는 퇴보를 반대할 주변을 설득시키기 위해 나름의 구색 맞추기 이성적 명분을 찾는 일.
그렇게 2017년 5월 15일. 나는 다시 S사 직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