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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트 Mar 25. 2021

기괴하다, 고로 아름답다. '얀슈반마이어'

초현실주의, 스톱모션, 현실 비판, 문학 재해석.


“어떻게 지내?”


작년 봄, 나는 영어로 된 의문의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계정의 이름은 발음할 수도 없는 서구권 여성의 이름. 연락을 무시했다. 그리고 올해 1월, 나는 호기심에 답을 보냈다.


“미안. 내가 페이스북을 잘 안 봐서. 넌 어떻게 지내?”

“그럭저럭. 근데 너, 내가 누군지는 알아?”


나는 답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 비네.”

“...!”


내가 어찌 비네(별명)를 잊을 수 있겠는가. 비관주의자에 탐미주의자. 우리는 지구 반대편, 다른 곳에서 자랐지만 나름 영화 취향도 인생관도 비슷했다. 나는 그 메시지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친구에게 1년 만에 답장을 해놓고서 웃을 수 있지, 싶겠지만 비네는 무려 5년 동안 잠수를 탔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그런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지나간다.


비네와 함께 지낼 당시에 찍었던 사진.

“I miss the good old cine days.”


나도 그렇다. 그는 예술 영화 동아리의 장이었고, 나는 공짜 음식을 주는 학교 행사에 갔다가 그를 만났다. 일주일에 한 번 예술영화들을 보고 정신이 나갈 때까지 싸구려 위스키를 퍼마시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술에 취해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드리우는 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면,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동아리원들은 죄다 방금까지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던 방바닥에서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더럽고 우스운 생활이었다.


동아리장으로서 영화를 선택하는 권한을 가졌던 그는 웬만해서 잊히기 힘든 영화들을 보여주었다. 5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제 영화 속에서 깨어났지만 그와 봤던 영화들은 전부 생생하다. 아그네스 바르다의 ‘Vagabond’, 얀 슈반크마예르의 ‘Faust’, 히로시 테시가하라의 ‘Woman in the Dunes’,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 윤성현의 ‘파수꾼’.


비네와 나는 급기야 그날 밤에 영상 통화를 했다. 비네의 잠수 5년에 나의 읽씹 1년, 총 6년 만에 봤지만 비네는 그대로였다. 시니컬한 말투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습관 모두.


“그때 봤던 거 뭐뭐 기억나?”

“그 여자가 노숙 생활하면서 점점 비참해지는 거. 화면은 기억나는데 제목을 못 찾아서 아직도 제목을 모르는데... 그거 뭐야?”

“아그네스 베르다의 Vagabond. 프랑스 감독인데 감독 이름 프랑스 발음은 나도 몰라.”

“그거랑 모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영화(Woman in the Dunes). 그리고 얀 슈반마이어의 파우스트. 나 그걸로는 칼럼도 썼었잖아.”

“그때 기억 잘 나나 보네.”




비네와 친구들과의 미친 생활을 접고 연락이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끊긴 6년 전 어느 날. 그냥 무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생각났다. 사과가 썩어 들어가는 형상과 꼭두각시 인형들의 기괴한 몸짓. 영화 제목이 ‘파우스트’라는 것만을 기억하고는 웹서핑을 통해 그 영화를 찾아냈다. 체코 출신의 노장 감독, 초현실주의 스톱모션을 만드는 얀 슈반크마예르의 ‘Faust’. 나는 갑자기 스톱모션과 초현실주의 영화에 꽂혀 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는 데까지 전부 찾아보기 시작했다.


(Jan Švankmajer라고 쓰는 그의 이름은 체코식으로는 k가 묵음이라 '얀 슈반마이어'라고 읽지만 영어식으로 '얀 슈반크마이에르', '얀 슈반크마이어', '얀 슈반크마예르'라고 부르며 k 발음을 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모든 이름을 혼용하여 쓰겠다. 그의 원래 이름인 슈반마이어로 부르고 싶지만 그렇게만 쓰면 검색하기가 어려워질 테니...)


' Faust'에 등장하는 장면들. 상당히 기괴하다.


솔직히 그의 작품을 보고 기분이 상쾌해지고 세상이 예뻐 보이고,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은 시각적으로 보기에 예쁜 것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담은 예술작품들이 있다. 그중에는 조금 마니악한 방식의 예술도 존재한다. 세상의 잔혹함을 알려주는 불편함과 괴로움을 보여주는 예술,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 어두운 마음을 드러내는 그로테스크의 예술이 그렇다. 얀 슈반크마예르는 진정 그로테스크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가 그저 끔찍하고 잔인하며 더러운 것,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이라면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은밀하게 유쾌하다. 산뜻함이나 상쾌함이 아닌, 규범이나 타인의 시선 때문에 넘지 못했던 선을 넘는 모습을 작품에서 발견하면서 느끼는 희열로서의 유쾌함이다. 예술 작품 속이 아니라면 우리는 언제 사람이 썩는 것이나 죽는 것, 잔인한 광기, 금기를 넘은 사랑이나 뒤틀린 가학성을 느껴보겠는가? (물론 실제 삶에서는 도덕을 지켜야 한다...)


금기를 넘은 사랑(?) -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왼), 극도의 통제와 그에 저항하는 광기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오)


얀 슈반크마예르는 시각뿐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과장된 기괴한 소리를 이용하여 그로테스크를 극대화했다.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유추하고 느끼는 촉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촉각적 상상을 더 자극하기 위해 Tactile Art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그로테스크함을 추구하게 된 것일까? 대가, 거장일수록 ‘그냥’이라는 답은 있을 수 없다. 그의 과거를 살펴보자.



얀 슈반크마예르는 1934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이제는 무려 90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 그는 음악‧연극 아카데미에서 인형극(Marionette and puppet theatre)을 전공했다. 그는 연극 공부를 계속하다가 영화에 비해 연극이 가지는 한계를 느껴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는 자신이 직접 인형을 만들고, 그 인형들을 여러 번 영화에 등장시킨다. 체코는 인형극 전통이 오래됐고, 인형극과 밀접하게 관련된 체코 애니메이션에는 인형극을 활용한 것들이 많다. 얀 슈반마이어는 체코 애니메이션을 계승하면서도, ‘환상’ 묘사에 초점을 맞췄던 다른 체코 애니메이터들과 달리 ‘잔인한 현실’에 관심을 가진다.*


* Michal O’Pray, “Jan Svankmajer: A Mannerist Surrealist”, Dark Alchemy: The Film of Jan Svankmajer, Praeger, 1995. pp.49-50. 이를 조중현, 2000년 12월, 「얀 슈반크마이에르(Jan Svankmajer)의 애니메이션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연구」,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pp. 119-161에서 재인용.


체코의 좌절된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


체코 역사를 알면, 약소국 국민으로 암울한 역사적 격동기를 겪은 얀 슈반마이어가 ‘잔인한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연한 듯하다. 그의 작품에는 체코 역사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두드러지는데, 그만큼 체코 역사는 암울했다. 체코는 16세기 초부터 몇 백 년 동안 지속적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잠시 독립하지만, 다시 1939년에는 히틀러에 의해 독일의 지배를 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에게 일부 지역을 할양하고 독립하지만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이에 더해 1968년에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지만 소련군의 개입으로 좌절당한다. 사실 우리는 작은 체코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만큼 자주 나라 이름도 바뀌고, 국경선도 바뀌었다. 이렇게 암울한 역사 속에서 얀 슈반마이어는 환상세계로 도피하기보다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사건의 핵심을 집어내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잔인한 역사적 상황,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인 슈반크마예르라면 그저 시각적으로 환상적이고 예쁜 이미지들만을 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사회 비판적인 것들이 많음에도 정부의 가혹한 검열에도 1970년대의 10년 외에는 다행히도 잘 살아남았다. (이 정도가 괜찮은 수준이라니...) 검열을 피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의 작품들이 ‘초현실주의’ 작품들이고, 종종 우스꽝스러운 유머가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Faust'의 한 장면. 슈반크마예르 감독이 직접 만든 꼭두각시 인형이 돋보인다.


초현실주의 영화라니. 나는 슈반크마예르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영화에도 초현실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난 처음 ‘Faust’를 볼 때 졸았다. 줄거리도 없는 듯하고, 무의미해 보이고, 개연성도 없는 것 같다. 잠깐잠깐 조는 사이에 눈앞에 나타난 영상은 마치 꿈과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상태로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떠가며 영화를 보았다. 나중에서야 나는 나의 감상법이 오히려 영화에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 슈반크마예르의 영화들은 초현실주의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는 무의미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며, 의식이 닿는 대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조다.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보통은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뜨와 같은 화가들을 떠올릴 것이다. 얀 슈반크마예르는 비논리적인 이미지, 의식의 흐름대로 꿈처럼 나타나는 이미지에서 더 나아갔다. 초현실주의를 ‘영화’로 재현해내면서 움직이는 영상의 역동성과 소리로 초현실주의를 더 강조한 것이다.


비논리적인 이미지들의 나열과 개연성 없는 전개. 그러나 그의 영화 자체는 예술로서 의미를 가진다. 만약 클리셰만 있는 영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뻔하고 지루하다 여길 것이다. 반대로 모든 클리셰가 깨지고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 펼쳐지는 영화, 초현실주의 영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새로운 자극은 새로운 생각을 가져온다. 기존의 영화를 부정한 슈반크마예르는 초현실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인형극 전공을 살려 완전히 새로운 실험을 한다. 바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패트와 매트(왼)과 핑구(오)


스톱모션은 사물이나 대상의 사진을 찍고 이어 붙여 영상으로 만드는 것으로, ‘패트와 매트’, ‘핑구’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에는 CG가 없었다. 비논리적이고 괴랄한 것들을 만들어 움직이게 하려면 색다른 방식이 필요했고, 손재주도 좋고 인형극 전문가인 슈반크마예르에게는 그것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그는 실제 인형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지만 새로운 컷을 사진으로 촬영할 때마다 조금씩 인형을 옮기고 나중에 모든 사진들을 빠르게 이어 붙여 마치 인형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촬영했다. 슈반크마예르는 인간과 인형, 사물과 인물을 넘나들기도 하며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영상 속에서 구현해냈다.


Jabberwocky(1971), 대화의 가능성(1982), Food(1992)


한 장면만 봐도 신기한 스톱모션 초현실주의 영화. 더 대단한 것은, 슈반크마예르는 그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 속에 사회 비판을 은유적으로 담아냈다. 작품을 작품 내용으로만 보면 의아하고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나열이지만, 침략, 억압, 폭력, 검열과 같은 사회상을 생각하며 감상한다면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발견할 수 있다.



얀 슈반마이어는 문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이를 활용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했다. 애드거 앨런 포와 마르키 드 사드와 같은 작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문학작품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그가 문학을 재해석하여 만든 작품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재해석한 <Alice(1988)>, 파우스트를 재해석한 <Faust(1994)>가 있다. 원작을 알고 영화를 보더라도 얀 슈반마이어의 작품들은 획기적이다. 이에 더해서 그는 체코의 전래동화 ‘오테사넥’을 재해석하기도 했다.


'오테사넥'의 포스터.


얀 슈반크마예르의 핵심인 ‘초현실주의’, ‘스톱모션’, ‘현실 비판’, ‘문학 재해석’의 네 가지를 전부 담아낸 영화 중 하나인 ‘오테사넥 Otesanek’(2000)(영문 제목 Little Otik)을 살펴보려 한다.


영화의 제목인 ‘오테사넥’은 전래동화의 이름이기도 하다. 불임부부는 아이 대신 나무뿌리를 키우게 되는데, 그 나무뿌리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로 크다가 결국은 한 할머니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 역시 비슷하게 진행된다. 호렉 부부는 아이를 갖고 싶으나 불임 선고를 받고 낙심한다. 부인을 달래기 위해 남편은 별장을 사고, 그곳에서 지내다가 나무뿌리를 발견해 아이의 모습으로 깎아 부인에게 선물한다. 그 순간부터 부인은 강박적으로 나무뿌리에 집착한다. 마치 그것이 진짜 아이인 것처럼. 호렉 부인의 집착이 커지자 부부는 오테사넥을 집으로 데려오려 한다. 진짜로 임신한 것처럼 꾸며 이웃들을 속이고, 마침내 출산일에 오테사넥을 데려온다. 이전까지는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뿌리였던 오테사넥은 집에 온 이후 진짜 아이처럼 행동한다. 이처럼 영화는 전래동화가 그대로 펼쳐지지만, ‘알츠베카’라는 새로운 등장인물이 있다.


호렉 부부와 같은 건물에 사는 알츠베카는 무관심한 어머니와 폭력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늘 겉으로 나돈다. 그녀는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오테사넥이 진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다. 점점 자라 가는 오테사넥은 엄청난 식탐을 자랑한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먹은 다음에는 고양이를 먹고, 우체부를 먹으면서 몸집을 불린다. 오테사넥은 끝내는 이웃사람을, 그리고 사회복지사를 먹는다. 이에 기겁한 호렉 부부는 지하실에 오테사넥을 건물 지하실에 가둔다. 오테사넥의 살해를 전부 모르는 척해주고 계속해서 오테사넥에게 음식을 공급한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먹는 오테사넥


그러던 와중, 알츠베카는 지하실에서 오테사넥을 발견하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묘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자신을 추행하려는 변태 할아버지를 유인해 오테사넥에게 잡아먹히도록 하기도 한다. 오테사넥의 살인이 지속되자 호렉은 부인의 반대에도 아이를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잡아먹힌다.


오테사넥은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건물 앞마당의 심은 배추를 전부 먹는 등 식탐을 조절하지 못하고 결국 배추밭주인 할머니가 오테사넥에 대해 알게 된다. 알츠베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오테사넥을 죽인다.


오테사넥 인형과 슈반크마예르 감독.


영화의 내용은 전래동화에서 따온 만큼, 초현실적이다. 나무뿌리가 아이가 되어 움직이는 모습은 스톱모션으로 생생하고 기괴하게 펼쳐진다. 그저 나무뿌리 괴물의 이야기였던 전래동화는 슈반크마예르에 의해서 스스로의 손으로 괴물을 키우는 인간과 원치 않았지만 괴물로 길러져 슬픈 괴물이 되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영화로 재탄생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오테사넥을 세상으로 불러온 것은 호렉 부부이다. 둘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다. 오테사넥이 하는 행동을 전부 옹호해주며, 오테사넥은 결국 괴물로 자라난다. 과보호를 받는 오테사넥의 반대편에는 알츠베카가 있다. 그녀는 애초에 사람이고 괴물이 아니지만, 오테사넥과 달리 부모에 의해 방치된다. 그녀 또한 살인을 유도하는 등 (자신을 추행하려는 대상에 대한 살인이긴 하지만) 괴물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살인하는 오테사넥의 죽음으로만 해결 가능한 상황을 불러온 것은 호렉 부부인 것이다.


오냐오냐 길러져 살인까지 저지르는 오테사넥과 방치되어 친구라고는 오테사넥 밖에 없는 알츠베카의 모습에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자신이 가진 것이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된 양 오만방자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 그리고 소외의 끝으로 내몰려 더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혐오의 프레임을 씌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길러낸 것은 극단의 자본주의, 빈부격차, 능력 만능주의, 극도의 경쟁사회, 그리고 이것들을 아이들에게 주입한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Insects'의 포스터(왼)와 영화 속 한 장면(오)


아쉽게도 그는 2018년, 마지막 작품 <Insects>를 발표하고 은퇴했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그의 모든 창의성과 기술적 정수를 마지막 작품에 쏟아 넣었다고 한다. 첫째 문제는 트레일러와 티저에서 벌레와 곤충이 징그러울 정도로 너무 나온다는 것. (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내성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치명적인 문제는 도대체 영화 파일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스트리밍 사이트에 풀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마이너의 서러움이다.




마이너 동지 비네에게 파일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비네. 혹시 얀 슈반크마예르의 <Insects> 파일 있어?”

“어... 잠시만... 영상도 자막도 없네. 나도 영어 아님 못 알아먹는데.”

“보고 싶은 것마다 볼 수 있는 데가 없어.”

“... 너 내가 추천해준 다른 건 봤어?”

“아니, 아직.”

“그럼 그거라도 봐.”



가장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라도 볼 수밖에. 나는 요즘도 가끔 <Insects>를 찾아본다. 찾을 수 없었다.





* 과거의 제가 쓴 얀 슈반크마예르에 대한 문학신문 뉴스페이퍼의 칼럼 '매혹적인 악몽, 얀 슈반크마예르'와 내용이 겹칠 수 있습니다. 자기 복제이지만 무단 펌이나 표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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