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야기'라는 영화제목을 보고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떠오르는가? '결혼'은 내가 선택하는 유일한 가족, 인생에서 영원한 내편이 생기는 일이라는데,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연인과의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인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행복하고 달콤해야 할 것이다. 영화 '결혼이야기' 에서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2초만에 사랑에 빠졌다'는 말처럼 운명같이 만나 사랑하고, LA와 뉴욕이라는 물리적 장애를 뛰어넘어가며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그 벼락같았던 운명의 사랑이 어디까지 치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듯 밑바닥까지 파경으로 치닫는 섬세한 이혼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우리가 운명이라 믿었던 것들
운명 같은 것을 잘 믿지는 않는다. 종교도 없고 사주나 타로 같은 미신도 잘 믿지 않는 성격 탓에 본래 운명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 사람이 인연인지 아닌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끌리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편안한 사람. 앞으로 오래 일상을 함께 하고 싶은 느낌. 이러한 인연은 수십만 분의 어려운 확률로 찾아온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년 남짓한 인생을 살아오면서알게 된 것은 나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소중한 인연에는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몸부림은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찰리와 니콜이 결혼의 끝에 서서 이혼 상담의 과제로 다시 새겨보는 상대의 장점. 영화는 장점을 나열하는 니콜의 나래이션으로 부터 시작되어, 이혼 후 우연히 장점이 나열된 쪽지를 읽으며 오열하는 찰리와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 니콜로 끝이 난다. 니콜은 울고 있지만 찰리에게 다가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는다. 둘은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다. 깊어진 상처의 골을 이런 것들로 다시 채워 넣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린 두 사람이기에.
사랑의 결의가 빛을 잃을 때
9개월 만에 글을 쓴다. 작년 이맘때쯤 쓴 글에서도 나는 관계의 본질이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도 지금도 관계의 본질은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남과 남이 만나 가족이 되는 관계이기에 더욱 특별한 책임을 요구한다. 사랑이 주는 도취적 행복, 쾌락과 성적 긴장만이 있는 유사 사랑에는 책임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책임의 회피는 아픔과 노여움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허무함이 남는다. 그 허무함은 끝을 암시하는 말을 하게 하고, 조건 없던 사랑에 조건을 붙인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에는 이유가 없지만 끝이 나는 데에는 항상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들은 작은 생채기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들, 애써 만들어온 둘만의 약속과 세계를 모두 불태우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의 결의는 빛을 잃는다. 그리고 그때서야 깨닫는다. 우리는 운명도 영원한 사랑도 아니었음을.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것도 당신이지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도 모두 당신이기에 끝내야 하는 관계.
이혼이 사랑의 실패는 아니다.
찰리는 니콜이 왜 그렇게 LA로 돌아가고 싶었는지, 그 열망을 헤어진후에야이해했다. 끔찍하고 잔인했던 이혼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뉴욕의 삶을 정리하고 LA로 이사 온다. 찰리는 할로윈을 핑계로 니콜의 집을 방문하며 UCLA에서 전임직을 맡아 LA에서 지내게 됐음을 알린다. 니콜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하지만 자기도모르게 그녀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진작 찰리가 LA로 왔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텐데,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결말부에 찰리가 니콜의 글을 발견하고 흐느끼는 장면은 둘의 결혼은 실패했지만 이것이 사랑의무화는 아니라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었던일이 없던일이 될 수 는 없다. 니콜도찰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만 해당 씬에서 둘이 끝까지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객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라라랜드가 그러했듯 사무치게 현실적인 이 결말이 나는 좋았다. 이별과 이혼이 사랑의 자체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다들 너무 오래 아파하지는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