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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막 거인 Apr 08. 2021

봉사가 이끄는 삶

해외 의료봉사 그리고 국내 봉사

총 3번의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 —> 베트남 —> 몽골 —> 순서로  2년마다 해외 의료봉사를 갔습니다.

직장맘이었기에   해외 의료봉사를 길게(일주일) 다녀오면 휴가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여행을 하는 기분과 같다고 말하고 싶어요. 즉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베트남과 몽골은 당시 초등학생 딸아이를 데리고 갔었고, 약국 보조로 약을 나눠 담고, 패킹을 하고 봉지를 자르는 일을 시켰습니다.

아이는 힘들었을 시간에 버티기로 참는 법과 응급상황에서 갑자기 이뤄진 수술 장면을 보면서 정형외과 의사의 꿈도 키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딸아이와 여행을 하거나, 학교, 학원에서 데려올 때 차 안에서 그때를 회상하곤 합니다.

딸아이와 이런 공유를 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캄보디아를 처음으로 해외 의료봉사를 갔을 때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캄보디아 기후 아시죠? 고온다습.

들어간 곳은 전기가 안 끊길 정도의 공간이었고, 무엇보다 선풍기(에어컨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도 없는 1층의 실내였어요.

실내보다 밖의 공기가 더 시원할 정도였다면 상상이 가시려나요?

진료를 위해 준비하는 순간 온몸이 땀으로 젓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력이 굉장히 뛰어나죠.

마음먹고  곳에서, 그쯤 일은 아무것도 니더군요.

각오는 사람을 극한 환경일지라도  버틸 힘을 줍니다.

(저 더위에 무척 약해요. 다한증도 있어서 손, 발도 늘 24시간 물이 흐르는 마르지 않은 샘이라고나 할까요)


 번째 해외 의료봉사는 제겐 다시 코이카로 이끄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어요.

( 이 이야긴 추후 따로 써볼까 합니다. 3번의 시험을 통과하고도 결국 가족일로 못 가게 됐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일정을 마친   혼자 귀국해야만 했습니다. 제 직장에서 휴가일 연장이 안돼서 저만 돌아오는 계획으로 출발을 했죠.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캄보디아의 공항은 출국자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마지막 비행기를 타야 해서 진료일정을 마친  간단히 샤워만 하고 겨우 공항에 도착해서 보니  말고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 들뜬 기분이거나, 걱정 어린 눈빛과 심지어 울고 있는 소녀? 아가씨? 까지 있었답니다.


밤 깊은 프놈펜 공항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메모를 하고,  그때 당시 끼고, 고쳐야   등을 적고 있었어요.

사람이 있는 곳은 어떤 좋은 이유로 갔더라도 문제가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후 베트남으로 큰 아이를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지금 베트남은 초고층 빌딩에 어딜 가도 한국의 문화를 느낄 수 있지만 제가 갔던 10년 전 그때는 상황이 달랐어요. 더군다나 베트남에서도 오지마을에 갔으니까요

( 그 후 베트남을 두 번 갔는데 놀랍게 발전을 했더군요.)

공안들에게 감시를 받으면서 진료를 했고, 사람들은 이웃나라 캄보디아랑 비슷하게 더운 기후에 살아서 그런지 비슷한 질병과 비슷한 약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몽골.

초원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감탄을 했던 것도 잠시뿐 하루하루 지나니 초원을 바라보면 감흥이 떨어지더라고요. 왜냐면 수도 울란바트르만 벗어나도 비포장길이 많아서 덜컹거리며 대략 5시간 넘는 장소 이동을 하면서 초원을 보면  그냥 풀밭입니다.

물론 심신이 지쳐서 그런 것 일 수도 있겠죠.

이곳의 사람들은 앞선 두 나라와 기후가 다릅니다.

몽골의 여름은 우리나라 가을 날씨같이 시원하고 습니다.

진료하기 최적이야~~ 외치면서 진료를 했지요.


세 나라 모두 그 나라의 수도를 통해 입국했지만, 수도에서 떨어진 오지마을에서 진료를 했습니다.

오가는데만 하루 6시간 이상 (왕복 7시간)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에 도착하고 씻고, 일정 정리 및 다음날 물품 챙기면 바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또 나가고 굉장히 타이트한 일정이었습니다.

힘들었지만, 결코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해외 의료봉사를   지원은 숙박해당이 되고, 비행기표  기타 일정 부분은 자비입니다.

물론 가는 일정의 휴가는 알아서 내고 가는 것이지요.

대학병원 근무자, 개인병원 , 개인 약국, 또는 각자의 근무지에서  여름휴가와 맞바꾸고  일정을 조율해서 참석하게 됩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서울에 있는 의, 치, 약, 간호, 치위생, 임상병리 연합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아주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의 지원을 받고, 매주 화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곤 했지요. 피아노 반주는  고등학교 때도 했던 성가대 반주를 끝으로 안 하고 싶었는데, 제게는 애증의 피아노 반주를 거기서도 하게 됐답니다.

진짜 애증의 피아노. 하기 싫어도 억지로 했던 기나긴 피아노 치는 생활.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제가 자라면서 느꼈던 강제적인 강요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요 무엇인지 몰라도 봉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착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개인주의자에 어쩌면 제 스스로가 이런 글을 쓰지 않으면 조금은 차가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외형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마치 페르소나처럼 달라질 때가 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봉사할 때입니다.

아는 , 후배들이 말하길 너는 봉사만 시작하면 말투와 행동이 한다고 했지요.

아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저에게 봉사는 그저 끌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과목을 너무도 잘 배운 탓에 정의를 좋아하고, 이타심에 불타는 마음이 있어서 세상은 함께 둥글게 지내야만 할 듯했습니다.

그리고 아빠의 영향을 받은 듯해요.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셨던 아빠는(지금도 아빠라고 해요. 아마 저는 아버지보다는 아빠라고 끝까지 부를 거 같아요) 제자들 중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많이 도와주셨고, 교직에 계시면서 늘 존경받는 스승님 이셨어요.

정년퇴직을 하셔도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았고, 지금도 스승의 날, 생신 때 연락 오는 제자들이 있을 정도예요. 지금은 요양원에 계셔서 외롭게 치매와 싸우고 있지만......

의대를 들어가도 의사의 길을 가지 못했던 사연, 그래서 제가 의대를 갔으면 내심 바랐던 아빠 마음. 어쩌다 제가 고2 때 집안의 어떤 일로 친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핑계도 적당하게 그즈음 공부에 나태해져서 결국 의대진학을 못하게 됐네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아마도 다른 의료일을 하면서 더 간절했기에 의료봉사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또 하나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오면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가 또 있어요.

우리나라도 어려운 사람 많은데 굳이 꼭 해외까지 가야 하나요?

글쎄요.

우리나라 의료봉사도 당연히 합니다.

생각보다 의료진들은요 주말에 봉사를 하러 다니시는 분들이 많아요.

또한 이주노동자, 장애인들을 위한 주말 봉사도 많이 한답니다.

저 또한 지금은 못하고 있지만 꾸준히 봉사하던 곳이 몇 군데 있어요.


그리고    굿네이버스를 통해 어느 달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보건교육을 하러 추운 겨울에 갔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려옵니다.

추운 날 보건교육을 하려고 오후 방과 후 아이들을 위해 갔고, 교육을 하고 무엇을 나눠주고 그 후 아이들을 보고 놀랐어요.

패딩이나 두꺼운 옷도 아니고 얇은 옷을 입고 놀고 있는 아이들.

학교 보건 선생님께 아이들 감기 걸리지 않을까요? 했더니 이 지역은 편부모, 조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많고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두꺼운 옷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들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넘길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살고 있는 지역맘 카페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겨울 외투를 모았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옷을 모았고, 속옷까지 챙겨주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양이 많아져서 혼자 옮기지 못해 도와주시기도 했습니다.


또 일을 쉬게 된 때가 있어서 그때 지역맘들과 함께 미혼모시설 청소 봉사를 했습니다.

다시 근무를 하게 되어서 오래 하진 못했지만 지금도 그분들은 거의 7년 넘게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곳 봉사를 하다가 주변에 어려운 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수학, 영어, 국어 지도 봉사까지 확장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살면서 저는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내가 모르는 봉사를 실천하는 천사들이 많이 있구나!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구나!

이웃들이구나.


우리는 왜 봉사를 해야 할까요?

정답없을 겁니다.

현답을 하자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삶이 봉사로 인해서 얻어지는 것이 많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절대 아니랍니다.


태어나보니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닙니다.

싫든 좋든 어울림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태어나서 사는 몫으로 남았겠죠.

하지만 내 환경이 누구보다 나아서 봉사를 하는 건 아니에요.

더불어 같이 조금이라도 나눠주면 온기가 나눠질까!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누구나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꿈을 꾸면서 그 꿈을 향해서 가닿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그때 얼마나 지치겠어요.

꿈이 다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꿈으로 가는 길에 좌절하거니, 도움이 필요하거나, 손을 조금이라도 잡아주는 것이 “봉사 아닐까 싶어요.


너를 돕다 보니 내가 너로 인해서 더 도움을 받은 거 같아! 이 느낌 아실까요?

물질로 도움을 줬다면,

상대에게 받는 것은 마음의 도움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이 있어요.

보시는 사진에서 왼쪽

“하얗게 웃어줘 라오스”라는 책입니다.

 청년이 그저 그런 삶을 살다가 우연히  다큐를 통해 라오스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도움을 주게 되고, 그것이 봉사를 하는 처음이 됩니다.

그리고 청년은 공부를 해서 도움이 되는 전공을 하게 되죠( 이건 책을 읽어보세요^^)

그 청년은 전공이 아니지만 치카치카 프로젝트를 실천하고 지금도 아마 실천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책은 국내 대학병원 전문의가 국경 없는 의사회를 택한 이야기입니다.

편안한 교수의 삶을 내려놓고 봉사의 길을 택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봉사는 때가 없습니다.


저는 지구촌 한가족이란 단어를 참 좋아해요.

지금 코로나 이후 많은 일들이 알 수 없게 생기고, 인종차별은 백인이 흑인을, 아시아인을 차별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모르는 들을 자꾸 할까요?


서로에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면은 이러지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게 봉사란 무슨 상관이냐고요?

혼자만의 세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물질이나 뭘 해서가 아니라 기도도 마음의 깊은 봉사입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겁니다.


봉사의 뜻을 보면 “남을 위하여”가 들어있어요.


조금의 관심과 배려가 남을 위한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나아질 거 같은데, 아닐까요?


봉사는 어쩌면 남을 위하여라고 쓰고, 나를 위해 더욱 노력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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