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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Apr 29. 2023

일하는 자와 사랑하는 자

# 4 Worker vs. Lover


마흔한 살, 은서는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 화면에 ‘체크리스트’ 앱을 켰다.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다음날 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정인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고, 심지어 자면서도 웅얼웅얼하며 해야 할 일을 되뇌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 확인한 것이다. “병이다 병...” 은서는 낮게 읊조렸다. 건망증이나 산만함 때문에 그렇게 병적으로 스케줄에 집착하는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성실하고 계획성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를 실제로 몰아가는 힘은 높은 불안도와 완벽주의였다. 촘촘히 하루 계획을 짜 놓아도 혹시나 있을 변수를 대비해 플랜 비 (Plan B)를 세워 놓는 건 물론이고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예상해가며 어떤 틈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견고하고 피로한 삶의 방식은 그녀가 온몸으로 방어하는 안전지대이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실은 파도 한 번에 으스러지는 모래성 같았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쉬워질 줄 알았는데, 왠 걸. 산 넘어 똥 밭이라더니 죽을힘을 다해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낯선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로 고민 하나로도 밤을 지새우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은 제일 하등의 것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해내야 할 역할이 배로 늘어났다. 거듭된 유산에 ‘내 인생 자체가 불임'이라며 절망하던 날들을 통과해 기적같이 딸을 얻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엄마로서 발 한번 헛딛으면 이 험난한 세상에 유리알 같은 딸이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속이 메스꺼웠다. 그뿐인가. 그녀를 현금인출기 취급을 하는 시댁. “은서 씨만 엄마야?”라며 대놓고 눈치를 주는 상사. 더 끌어주지 못해 미안한 후배. 생각하기도 벅찬 여러 관계의 거미줄 속에 언제 툭 끊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다 보면 이렇게 인생이 끝나버릴 거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은서에게 ‘체크리스트’는 그녀가 붙잡고 있는 “정신 줄"이자 “부적"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 나가는 모래알들을 훔켜쥐기라도 하듯, 은서는 오늘도 핸드폰 속 스케줄러를 꼭 쥐고 구구단 외우듯오늘의 할 일을 되뇌었다.


그나마 한숨 돌리는 시간은 엄마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요즘은 은서의 마음 한켠을 옥죄어 왔다. 엄마는 작년부터 은서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계셨는데, 합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금씩 발현되기 시작한 엄마의 알츠하이머 증상 때문이었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엉뚱한 행동을 하면 같이 화라도 내겠는데, 엄마는 자신의 증상을 자각하고 있었고 어떻게든 정신을 온전히 붙들려 애쓰는 모습이 되려 은서를 무너지게 했다. 한 번씩 정신적 혼란이 올 때마다 엄마는 어디 깊은 심연에서 죽을힘을 다해 수면 위로 떠오르려는 잠수부처럼 눈을 질끈 감고 온 얼굴을 찌푸리며 숨을 참았다. 그럴 때면 은서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함께 숨을 참고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아직도 기억 저편의 어딘가에 잠겨 있는 듯 말했다. 

“도시락은 가져갔니? 이번 주 내내 매점에서 빵만 사 먹어서 어떡해… 교복도 못 빨아줘서 세탁기에 있던 걸 그대로 입고 가고… 미안해 우리 딸.” 

엄마는 기억 속에 중학생 은서를 만나고 있었다. 거듭되는 사업 실패에 엄마가 가세를 일으켜야 해서 따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던 시절. 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은서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엄마, 나 친구들이랑 다 같이 매점에서 사 먹는 거야. 걱정하지 마. 그리고 교복은 내가 빨아 입어야지 왜 엄마가 빨아줘. 다 큰 딸 놔두고 무슨 소리래” 

은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중학생이 되어 말했다. 엄마에게 한가지 배운 게 있다면 서두르지 않는 것이었다. 외면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으며 그 순간에 머무르는 것. 이제는 은서가 엄마를 기다려 줄 차례였다.


엄마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응….” 은서는 돌아온 엄마를 보며 긴장이 풀어짐과 동시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엄마, 나 지금 정원이 데릴러 가야 해. 아직 기획서도 다 못썼는데... 사실 오늘 야근도 해야 하는데 그냥 온거거든.. 내일 새벽에 어머님이랑 병원도 가봐야 하니까. 근데 저녁은 어떻게 하지? 엄마 식이요법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식단도 못 짰네. 아 근데...” 엄마에게 말하는 건지 본인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르게 은서는 그녀가 할 일을 또 습관처럼 주르룩 읊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은서야.”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얼굴로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네가 나한테 물어본 적 있지?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는 삶이냐고. 그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대답했던 거 같은데… 엄마도 사실 그때 답이 뭔지 몰랐어. 답이란 게 있을까 싶기도 했고. 근데 엄마가 팔십이 다 되어 보니 적어도 내 인생에 대한 답은 찾은 거 같다. 


엄마는 한평생 쉬지 않고 일했잖아. 너도 기억할 거야. 처음엔 돈이 궁해서 시작했고 너희 공부시키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지만, 나중에는 그 일과 내가 하나가 되어 멈출 수가 없었어. <빨간 구두> 동화에 나오는 카렌이 자기 다리를 자르기 전까지는 춤을 멈출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야. 내 일이 곧 내 정체성이었지. 그래서 일을 멈추는 순간 나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한가지 후회되는 건 이거야. 엄마는 일하는 사람(Worker)으로는 열심히 살았지만,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Lover)으로는 살지 못했다는 것. 

Worker와 Lover의 차이가 뭔 줄 아니? Worker는 그것이 월급이든, 명예든, 영향력이든  보상을 위해 일을 하지. 반드시 자기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기 원해. 그래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다면 일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지.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Lover는 Worker보다 항상 몇 배의 일을 더 해낸다는 거야.  Lover가 원하는 보상은 “사랑할 수 있는 힘”, 그 자체이거든.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일이다 보니 주어진 것보다 더 하게 되고 가야 할 길보다 더 가게 돼. 애초에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Worker보다 힘을 덜 드리고 더 오래 갈 수있는 거야. 그리고 인정받던 못 받던, ‘나에게 이런 사랑할 힘이 있었다니!’ 하며 감격과 감사로 일 자체를 바라보게 되지.

그런데 Worker가 Lover로 변화되었을때 일어나는 일이 뭔지 아니? 바로 체크리스트를 던져버리는 거야. 사랑으로 하는 일은 더 이상 성취에 관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더 손해인가 따지며 점수를 매길 필요도 없어지는 거지. 매일 리스트를 보며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아도 막상 끝나고 보면 더 많은 것을 해낸 거야. 엄마가 살면서... 이따금씩 Worker가 Lover로 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황홀한 일이었단다.


은서야. 엄마는 네가 Worker로 살면서 많은 것을 성취하기보다는, Lover로 살면서 체크리스트 따위 던져 버리고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좋겠어. 사랑하는 것만큼 온전하고 안전한 것은 없거든. 후회 없이 살고 싶다면,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데 최선을 다해봐.”


은서는 딸 정원을 데리러 가는 길에 엄마가 한 말을 되뇌었다. 은서가 정원을 키우는 일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은서는 정원에게 Worker가 아니라 Lover였다. 엄마의 말이 너무 이상적인듯 하면서도 이미 은서는 정원을 통해 그 이상적인 삶을 맛보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 정원은 은서를 보자마자 해처럼 밝게 웃으며 뛰어와 안겼다. 아무에게도 평가받을 필요가 없는 일. 플랜 비(Plan B)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 아무 대가도 없지만 그래서 끝까지 할 수 있는 일. 내가 너의 피할 지붕이 되어주는 일 - 사랑. 엄마가 목도했다던 그 황홀한 사건이 자기 삶에도 도래하기를, 은서는 정원을 품에 안고 소망했다. 



• Soli Deo Gloria •



*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이윤승 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서비스 <레퍼런서의 글>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 원 제목은 <관계라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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