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없을 만큼 순전한 진심이었는데, 글을 내보이고 나면 왠지 내가 가면을 쓰는 건 아닐까, 내가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인척 시늉 떠는 건 아닐까 속이 뜨끔거렸기 때문이다. 글에서 피어오르는 삶에 대한 소망은 매일 덮어지는 새 눈처럼 희고 포근하기만 한데, 실제 살아내고 있는 나의 삶은 그 새하얀 눈 길을 더러운 신발로 저벅저벅 흩트려 놓아 구정물로 변하고 마는 버려진 길 같아서 그 간극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움이다. 하지만 그 간극이 나를 얼마나 비웃건 나는 그 사이를 다시 한번 헤엄치고 싶다. 중학생의 딸아이가 학교 가기 전 아침마다 식탁에서 올리는 기도 때문에 더 그렇다. "오늘도 엄마가 좋은 글을 쓰게 해 주세요." 나는 뗏목 같은 글감 하나 모으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나 대신 그 망망한 바다에 계속해서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그 아이가 고마워서라도.
더 고마운 것은 글 속에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신 박완서 선생님이다. 나는 여러 종류의 책을 다독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몇몇 작가님들의 같은 책들을 읽고 읽고 또 읽는 독서습관을 갖고 있는데 그중 단골은 단연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다. 글 속에서 드러난 선생님의 솔직하다 못해 발가벗은 내면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며 나 혼자 느끼는 깊은 내적친밀감 때문일까. 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 덕분인지 사람들은 우리(내 맘대로 '우리') 보고 착해 보인다, 순해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춰내면 앙칼지고 예민하며 까다롭다. 나를 조금 아는 사람은 날 착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은 모두 나의 무엇하나 그냥 넘어감이 없는 예민함을 알고 있다. 예민함은 내가 가진 칼날이다. 누구보다 오만방자하고 이기적이지만, 스스로라고 예외 없는 예민한 자기 검열의 칼날 덕분에 두말 없는 참회도 빠르다.
선생님과 나는, 고학력을 가진 딸로 엄마의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게 했지만, 이내 '지긋지긋한 엄마'의 말뚝에서 한평생 빙빙 도는 모습이라던지. 전쟁이던 처녀시절 백조처럼 겉으로는 고고하나 물밑으로는 물갈퀴를 사정없이 그으며 살던 모습. 그나마 수더분한 남편을 만나 응석 부리는 삶을 살다가도 마흔에 이르러 화롯불 같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글을 쓰는 모습. 여성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안락한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에 시달리는 모습 등...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선생님과 나의 희미한 유사점을 무리하게 줄 긋기 해가며 반사적 광영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 유아적인 내 모습이다.
글처럼 살지 못해 위선적인 것 같다는 죄책감을 뒤로하고 다시 글을 써볼까 용기를 낸 건 선생님의 <빈 방>을 읽으면서부터다. 선생님이 천주교 신자이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때같은 외아들을 사고로 잃고 나서 쓰신 <한 말씀만 하소서>나,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 성경을 통독"하셨다는 선생님스러운 앙칼진 말씀이 어찌나 몸서리치게 좋던지. 나도 요즘은 그렇게 다 까발려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으니까. 말씀이 날 살려도 그때뿐이고, 토해내듯 기도해도 뒤돌아 서면 다시 구덩이 파고 들어가는 내 모습도 괴롭고. 서로 서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며 안타까움을 빙자한 정죄함을 바라보는 것도 지치고. 거룩한 척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면서 '어디 어떻게 되나 보자' 되뇌며 넝쿨 밑에 앉아 있는 요나 같은 마음도 진절머리가 난다. 어디까지가 위선이고 어디서부터가 위악인지 모를 여러 겹의 혼돈 속에 선생님은 여봐란듯이 고백하신다.
"주님,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빈방에 인색해지다 보니 우리 마음속에서까지 남에게 내줄 빈방이 없어지는 거 있죠. 마음속에도 빈방이야 많죠.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춥고 시리고 고달플 때 식구나 친구나 이웃의 마음에 있는 빈방에 들어가 쉬며 위안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남을 위해 내가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주님, 저의 기도가 우선 제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되게 하소서." (빈방, p. 213)
맞아요 선생님. 저도 빈방은 많은데 내줄 빈방은 없어요. 선생님은 제 맘을 아셨군요. 선생님도 그것 때문에 힘드셨군요. 선생님도 그런 마음을 글로 쓰셨군요. 선생님도 더러운 옷을 입은 채 현존하는 예수를 만나셨군요. 웃는 반달눈을 하시면서도 명철하고 까다로운 선생님의 글을 통해 예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내 방을 너에게 다 나눠줄게', '내 방은 좋은 것으로 가득 찼단다'라는 허울 좋은 고백보다 '사실 나는 빈 방뿐이야. 너에게 주고 싶지만 두렵고 겁이 나. 하지만 이렇게 잠긴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아. 도움이 필요해'라는 고백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미진하게나마 앞으로 천천히 글을 쓰게 된다면, 문을 열고자 한다는 두드림. 들어와도 괜찮다는 작은 속삭임. 빼꼼 연 문틈으로 쏟아지는 가느다란 빛. 그리고 얼마간 함께 지내자는 초대. 그런 글들이 된다면 좋겠다.
지난 크리스마스때 뉴욕에 갔을 때 한인책방에서 운명처럼 발견한 선생님의 소설 <미망>을 나에게 선물로 주며 새해 몇 날밤이 새도록 다시 읽었다. 문득, 난 꼭 전 씨랑 결혼해서 딸 이름을 태임으로 짓겠노라 다짐하던 중학생시절이 떠올라 빙긋이 웃었다.
•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