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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승 May 15. 2022

당신의 인생에 조연이 된다는 것

지난 4개월간의 근황 보고


짐짓 무심하고 냉소적인 듯 하나, 나는 실은 누구보다 타인의 인생에서 주연 자리를 꾀차고 싶었던 불타는 마음의 소유자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잊혀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 아니, 잊혀지기는 커녕 모두의 중심에 서서 관심 없는 얼굴로 관심을 모조리 받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새파란 시절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든 주연이 되고 싶은 그런 인생 말이다.
 



그런 나에게 어쩌면 내 삶의 소명은 누군가의 인생의 주연 자리를 꾀 차는 게 아니라, 조연의 역할을 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일렁였다.

예전에. 스물두 살인가 세 살 때. 하나님이 "윤승아, 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틈을 보는 자야"라고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아 마음에 품고 평생을 살았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이사야 58:12) 하신 그 말씀이 그때는 멋모르는 아이 마냥 그저 기뻤다. 무너진 곳을 세워 보수하고 다시 튼튼하게 한다니, "그러면 그렇지!"하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지만 틈이 보인다는 것은 남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이 보여야 하는 자다. 자세히 봐야 하고, 굳이 보기 원하지 않는 것까지도 눈에 들어오는 자다. 무너진 곳을 세워 보수하려면, 무너진 곳을 찾아다녀야 한다.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려면, 거할 수 없는 상태의 곳을 뚫고 다녀야 한다. 이런 일은 보통.. 정복전쟁을 나서서 승리를 거두는 장군이나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나 성스러운 제사장이 하는 일이 아닌, 성벽을 돌아다니며 구멍을 메꾸는 도시의 조연들이 하는 일 일 테다.

종종. 사실은 자주. 사람들 말의 행간의 의미나, 스쳐 지나가는 말투, 앞뒤의 미묘한 정황이나, 남몰래 내쉬는 한숨. 호탕한 웃음 뒤에 흔들리는 눈빛까지 왜 읽혀지고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지 괴로웠다. 그리고 틀렸으면 좋겠는데 맞을 때가 더 많아 피하고도 싶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민감한 나를 보고 엄마는 말했다."아이고, 인생 피곤하겠다야." 그렇게 하루를 피로하게 만들 수도 있는 감각은, 실은 '무너진 틈을 보는 눈'을 선물로 주신 것 일지도 모른다.

 



작년 12월 31일을 끝으로 만 4개월의 시간 동안 브런치에 글을 하나도 올리지 못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이나마 나의 안부를 궁금해해 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이 계셔서 무척이나 놀랐고 감사했다). 최근에 올린 글의 제목은 <30대 마지막 날의 기록: 비등점이 다가온다> 였는데, 지난 4개월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그 비등점을 맞을 준비를 차근차근시키셨다. 예전에는 인생의 비등점 -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다가 드디어 보글보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점 -이라는 것이 어디 좋은 학교에 합격을 한다던지, 이름 있는 직장이 된다던지, 승진을 했다던지 하는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한 건 했다. 성취의 꼭짓점에 다다랐다"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비등점은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나누는 시점에서 시작이 되었다.

지는 4개월 동안 글은 쓰지 못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작년 12월에 있었던,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 <창고 살롱>에서 나의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 도대체 그 "저널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2월부터 5월까지 5주 차 소그룹 세미나를 각각 1기와 2기에 나눠 두 번 진행하기도 했고, <패런트리>라는 온라인 양육 프로그램에서 질문하고 저널링하는 삶에 대해 강연을 할 기회도 있었다. 지난 6년의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순간들이 두 시간짜리 프레젠테이션으로, 5주짜리 세미나로 집약되고 선보여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여정이라고만 여겨졌던 시간들이 타인들에게 공감과 울림이 되고 변화의 마중물로 쓰여진다는 것은 나를 전율시켰다.


특별히 창고 살롱에서의 4개월에 걸친 소모임 시간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이식 수술을 받는 것과도 같은 프로세스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사울의 마음"을 도려내시고 "요나단의 마음"을 심겨주신 일이었다. 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사울. 왕위를 찬탈할 생각도 없는 다윗으로부터 끊임없는 paranoia와 위협을 느끼고 평생을 불안에 떨며 온전히 자기중심적 삶을 살았던 사울의 마음이 내 안에 암덩이와도 같이 있음을 드러내셨다. 타인과의 관계를 늘 경쟁구도로 느끼고 어떻게든 앞서가고 우위를 선점하기 원했던 사울의 마음. 왕이면서도 사로잡힌 노예의 마음으로 살던 사울의 마음. 그것을 보여주시면서 "윤승아, 내가 너에게 사울의 마음을 가져가고 요나단의 마음을 줄 거야."라고 하셨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자 정통으로 왕위를 계승받을 적자이다. 다윗의 존재에 위협을 받는다면 사울이 아닌 요나단이 받는 게 마땅했던 사람이다. 그런 요나단은 누구보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지경(즉, 자기의 정체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와 다윗을 비교하거나, 아버지인 사울로부터의 불안을 답습하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혈혈단신 적진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다윗과의 우정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하고, 아버지 사울의 이해 안 가는 광기에도 정죄하지 않고 끝까지 아들로서 자기의 본분에 충실하다 결국은 아버지와 함께 전사한다. 도대체 이 요나단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이라고 왕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이라고 욕망이 없었을까?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았던 요나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했던 요나단은 (세상적으로 봤을 때 위협과 경쟁상대가 될 수 있는) 다윗과의 관계도 안정적일 수 있었고,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다윗의 인생의 빛나는 조연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요나단의 심장을 나에게도 주신다고 하셨다.

요나단의 마음을 묵상하고 있을 때 마치 그에 대해 확인 도장을 찍어주시기라도 하듯 창고 살롱의 혜영 님을 통해 말씀이 흘러 들어왔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하지 마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 (로마서 12:9-10)

 



내 안에 요나단이 살아나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없던 힘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왔다.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긴장하고, 특히 강연을 하라 그러면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내가, 밤을 새워 강의 준비를 하고 신이 나서 두 시간 넘게 얘기를 할 때.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내가 드러나고 싶어서, 좋게 보이고 싶어서,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내가 주연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내 삶을 바꿔놓은 것이 혹시 당신의 삶도 바꿔놓을지 몰라서. 그 기대와 확신을 이야기하니,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고 신속하게 내가 해야 할 말들을 알려주셨다. 내 안에 있던 갈망. "더 이상 이대로는 살기 싫다." "더 나은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누군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고 싶다." "더 이상 휩쓸려가듯 살고 싶지 않다." 이러한 끝없는 갈망과 목마름이 우리(소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이 두렵고 놀라운 여정을 함께 시작하게 했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도전과제들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 내에서 포기하지만 말고 끝까지 가는 것. 우리 모두 그것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했다.  


그렇게 그 길을 가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에게는 예상치도 못한 변화와 회복들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갑작스럽게 잃으셔야 했던 HJ님은 하나님 안에서 그 상실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셔야 했다. 하나님께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그분을 떠날 수도 없었던 그 진퇴양난의 시간들. 이제껏 피해왔던 감정들과 질문들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터놓았을 때 하나님은 가장 급박하고 괴로웠던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셨었는지,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해주셨었는지를 보여주셨다. 누구의 위로인들 채워지지 않았을 그 가슴의 구멍을 하나님이 만져가기 시작하시면서 HJ님은 자신을 소개하는 단어로 "Believer"라고 쓸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셨다, "전 영영 제 자신을 그리 부를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믿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했으니까요. 솔직히 Believer의 무게감을 감당할 자신도 마음도 없었고요. 그런데 오늘 Believer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것 아니지만 정말 용기 내어, 감히 제 개인 공간에 그 단어를 더해 보았어요. 가장 끝 자리에 썼다가... 다시 자리를 옮겨 가장 앞으로 옮겼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아니 그리 되고 싶어서요."


누구보다 열정 넘치고 성실한 커리어우먼으로써의 정체성과 하나님 안에서의 소명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 고민하시던 JE님은 저널링 작업을 하시면서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시작하게 되셨다. 이전에는 내게 주어진 위치와 책임을 통해 열심히 사역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다는 것.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다는 것. 한강 물결을 보면서도, 아이들 저녁상에 생선을 발라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다른 지경의 친밀감 안으로 들어갔음을 고백하셨다. "아이들을 위해 저녁 반찬으로 생선을 발라주시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가 하는 일이 너와 네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서 바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고 있는 거란다. 내가 결국 다 사용할 거야. 물고기를 함께 나눠 먹으려면 누군가는 잡아야 하지 않겠니? 너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야. 많은 사람들과 나눠 먹기 위해 네가 지금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거다. 그러니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낙심하지 말거라. 너의 모든 능력은 다 내가 주었고 결국 내가 다 사용할 거야.'" 너무 내 생각만 하며 사는 것 아닐까 고심하던 JE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시며 격려해주신 사건을 통해 JE님은 더 큰 자유와 평안 안으로 들어가신 것 같았다.


처음 이 소모임 준비를 하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 주저하고 머뭇거리던 나에게 가장 안전한 판을 깔아주셨던 HY님. 돌다리를 백번쯤 두들겨 봐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나에게 "괜찮으니까 일단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세요!"라며 먼저 믿음의 발자국들을 성큼성큼 내디뎌주신 HY님 덕분에 우리 모두는 말도 안 되는 간증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런 HY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하와이 마우이 섬에 있는 Banyan Tree를 보여주셨었다. 그 나무는 마우이 섬의 도시 한 블록 전체를 덮을 정도로 크고, 실제로도 미국 내에서 가장 큰 나무로 꼽힌다. 가서 보면 여러 그루처럼 보여도 사실은 다 하나의 뿌리를 갖고 여러 갈래의 가지들로 연결되어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다. 겉에서 볼 땐 여러 그루이지만 하나의 뿌리(하나님)를 두고 쭉쭉 연결되어 뻗어나가는 모습. 두려움 없이 하나님이 주신 영감들을 시도하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그녀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는 "커넥터"로써의 정체성인 것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HY님에게 약속으로 주신 이사야 58:11 말씀 (메마른 곳에서도 물 댄 동산으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을 받으면서도, '그럼요 하나님, 저 정도 나무 물 대시려면 엄청나게 물댄동산으로 만드셔야 해요'라는 흐뭇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 외에도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원에서부터 저널링에 참여해주시고 모임을 이끌어 주신 분, 사업 관련 고민을 하시던 중에 직업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신 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면서도 누구보다 갈망함으로 하나님이 이제까지 인도해오신 자신만의 신명기를 기록하신 분 등등. 5주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도 자체적으로 후속 모임이 결성되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는 "기도 샤워 주간"을 계획하시면서 유기적이고 자발적으로 모임이 성장해나가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분명했다.

사유원 모과나무 (출처: 롯데호텔 매거진. (c)강위원 / 사유원 제공)


우리의 사유원: 연결의 생명력
창고 살롱의 마지막 오픈 모임  우리가 서로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중 포포포 매거진(popopomagazine.com) 대표이신 정유미 님이 하신 말씀 중에 사유원 모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많이 남았다. 경상북도 군위군에 가면 <사유원>이란 모과나무 수목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팔려나가는 모과나무들은 풍토에 예민한 식물의 습성 때문에 일본에 도착한 후에 얼마 안돼서 병들어 죽고 만다고 한다.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기업가께서 일본에 팔려나가 죽을 운명에 모과나무들을 웃돈을 주고 하나둘씩  모아 어느덧 100그루가 훌쩍 넘었고, 나무가   있는 환경을 조성하다 보니 사유원이란 특별한 수목원이 만들여졌다고 한다.

 기업가님은 모과나무를 통해서 어떤 부를 축적하거나 이윤을 창출할 목적이 있으셨던  아니라, 그저 한그루 한그루가 너무 귀해서.  아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없어서 모으다 보니 하나의 고유한 숲을 이룬 것일 테다. 우리의 저널링 모임도, 창고 살롱도,  공간에서 어떤 사업을 이끌어내고 이익을 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우리도 토양에 민감한 모과나무들처럼  그루씩 혼자 있으면 세상 속에서 말라져  버릴  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모여서 끊임없이 연결이 되어 살아 있는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사유원이라는 것이. 내가 이런 사유원에 들어와 있어 살아 있을  있다는 것이, 문득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다윗과 사울처럼 누구나 다 알아봐 주는 주연은 아니지만. 주연보다 더 자기 역할을 확실하게 아는 조연으로. 그런 요나단의 마음으로. 한그루 홀로 우뚝 서 있는 나무보다 얼기설기 엮여 있는 사유원의 모과나무로. 나도 그렇게 기꺼이 당신의 삶의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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