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가시나들의 캠핑
‘엄마, 엄마는 나를 그렇게 못 믿겠어요?’
한 밤 중에 친구들을 만나고 와도 되냐는 요청에 허락을 해주지 않았더니, 시현이가 꺼낸 말이다. 아이의 실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잠깐 흔들렸으나, 이 겨울에 그것도 새벽 1시에 길거리에서 배회를 하겠다는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나름 ‘아이들을 잘 믿어주는 엄마’로 스스로를 여기던 나는 아들의 말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말이 며칠을 두고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기질적으로 디테일을 챙기는 세심함이나 아기자기함과는 거리가 좀 멀다. 그래서 아이들 양육에 있어서는 방목을 하는 편에 속한다. 큰 맥을 짚어 주고 나면, 나머지는 본인들이 알아서 하게끔 한다. 아이들 나름대로의 ‘상식과 문제해결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아이들이 실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이 내 백 마디 훈수 보다 낫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시현이의 저 질문은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치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나는 크면서 ‘엄마의 믿음을 사랑의 증표’로 알고 자랐다. 나의 큰 줄기만 잡고 가는 기질은 엄마를 닮았는지, 엄마 역시 알콩달콩한 면이나 잔정은 없으셨다. 친구들이 엄마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 엄마는 나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친구들은 엄마로부터 갖은 지청구와 야단을 맞고 컸지만, 나는 거의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 그런 엄마가 서운하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어느 날, 엄마의 언뜻 무관심해 보이는 모습은 ‘내가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중학교 다니던 때였다. 어느 여름 방학 때, 나는 동네 여자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인생 최초 ‘캠핑’을 계획했다. (나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 따로 야영이 필요치 않은 환경이었다.) 때는 80년대 중반, 캠핑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때였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대학생들이 캠핑을 간 모습을 몇 차례 봤던 것이다. 그 시절, 시골 깡 촌에 무슨 텐트가 있었겠는가? 집에서 사용하는 천막과 장대 몇 개로 텐트를 만들기로 하고, 밥은 냄비와 쌀을 가져 가서 불을 지펴 해먹기로 했다. 바지락을 캐서 국도 끓여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을에서 벗어나서 우리만의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하고, 그에 걸맞은 장소도 확정했다.
첫 번째 난관은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을 것인가를 놓고 열심히 토론을 했다. 우리가 정한 야영 장소는 마을에서 한 시간 정도 동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사람이 무서운 것 보다는 바로 산을 면해 있는 바닷가이니 혹시 위험한 일을 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설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면 허락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 바로 엄마에게 우리의 캠핑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의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신이 난 나는 다음 날, 다른 아이들 상황을 점검했다.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하곤 거의 야단을 맞거나, ‘가시나들이 그런 위험한 짓을 한다’며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집안일을 솔선수범해서 도와 드리기도 하고 조르고 구걸하다시피 해서 몇 명의 친구가 더 허락을 받았다. 두 명의 친구는 끝내 부모님 허락을 받지 못했으나, 더 이상 설득을 포기하고 몰래 도망치듯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2박 3일로 예정한 우리의 최초의 캠핑은 1박 2일로 성급하게 또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우리가 선택한 야영 장소에는 밥을 지을 담수가 없었고 불을 지필 땔감도 구하기 어려웠다. 바지락을 캐서 맛있게 국까지 끓여 먹겠다던 우리의 만찬 계획은 허황된 꿈이었다. 나뭇가지를 꺾어 지핀 연기 풀풀 나는 불위에서 겨우 익힌 설익은 밥과 집에서 가져온 김치로 허기만 겨우 달랠 뿐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물 때’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이부자리에 이불을 깔고 덮고 누워 모기에 뜯기며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발이 축축했다. 바닷물이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 곳까지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야영을 갔던 때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들어오는 때였던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은 물 때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야영 장소는 땔감과 민물이 없다는 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젖은 이불을 수습하고, 찰싹 찰싹, 자잘하게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까무룩 잠이 들려던 그 때, 갑자기 깜깜한 바다에서 환한 불빛이 비쳐 오고, 어른 남자들의 소곤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공포심에 얼어붙었다. 잠시 후, 불빛이 사라지더니 소곤거리던 사람 소리도 조용해졌다.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느낌만 나고 형체는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공포심은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숨도 크게 못 쉬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환한 빛이 켜졌다. 강력한 불빛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싸서 소시지 뭉치처럼 보이는 우리들을 위아래로, 또 이리저리 훑었다.
집에서 쓰는 천막과 장대, 그리고 관목 나무가지를 잡아당겨 노끈으로 얼기 설기 묶은 텐트, 아니 천막과 작은 몸체들을 통해 우리가 애들인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놀러 온 모양이라고 소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얘들아, 너희들 놀러 왔나 본데, 여기는 야영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다. 지금은 어두우니까 내일 아침 되면 집으로 돌아 가거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는 대답할 엄두도 못 냈다. ‘더 놀지 말고 아침에는 꼭 집에 가야 된다.’ 라고 한 마디를 더 이르고 그 배는 떠났다.
그렇다. 당시는 아직도 반공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때였고, 그곳은 해안경비대가 밤이면 순찰을 돌던 곳이었다. 소문인지 진실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야영을 하던 곳에서 예전에 간첩이 나왔었다는 얘기가 나돌곤 했었다. 장소를 물색하던 당시에는 재밌게 놀 생각에 들떠 그런 이야기는 우리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다시 짐을 싸서 동네로 들어왔다. 피난민처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 동네 어른들이 한마디씩 하셨다. 웃으시며 재밌었냐고 묻는 분들부터 개구져도 너무 개구지다고 나무라시는 분들까지 반응은 다양했다.
해양 경비대의 출현으로 마음이 졸아든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에게 해양경비대 이야기는 쏙 빼고 모기떼와 배고픔 때문에 돌아왔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피식 웃고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뒤돌아서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날, 우리는 소나무 그늘에 다시 모였다. 친구들은 야단을 맞았다며 시끌시끌했다. 특히나, 허락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내뺀 친구들이 혼구멍난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었다. 당분간은 집에서 납작 엎드려 있어야 된다며 친구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때였다. 나는 그 엉성하고 말도 안 되는 우리의 야영을 흔쾌히 허락해주고 그 이후에도 별 말씀이 없으셨던 엄마에게 매우 감사했다.
엄마는 우리 계획의 허술함도 약간의 위험이 따를 가능성도 어느 정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반대도 야단도 하지 않으신 것은 엄마가 내게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막상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상황을 헤쳐 나올 것이라고 믿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중학생의 나는 그렇게 엄마의 사랑을 확인받은 것 같아서 마음이 오색 비누방울처럼 몽글몽글해졌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엄마의 그 믿음을 여러가지 다른 모양으로 경험했다. 고등학교 진학 시에는 가난한 살림에도 고등학교를 먼 육지, 전라도 광주로 가겠다는 나의 선택을 엄마는 두 말없이 지지해 주셨다. ‘없는 살림에 학교를 보내는 것이니 가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는 흔하고도 흔한 충고 한마디도 없으셨다. (나는 자라면서 엄마로부터 공부하란 소리를 들은 적도 한 번도 없다.) 그저 우리 가정 형편에 맞춰 일 년에 17만원이던 사글세 방을 구해 주셨다.
대학을 선택할 때에는 우리 집 사정을 알고 계셨던 담임 선생님이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이 되는 학교와 과를 추천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게 그 이유도 묻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내 결정을 완전히 믿고 존중하셨다. 그저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는 엄마의 말없는 믿음을 딛고 나는 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엄마의 나를 향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실상은 백 마디 충고와 가르침보다 더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지만 나는 많은 정신적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타고난 것도 있었겠지만, 엄마의 전폭적인 믿음으로 살찌워진 내 모험심이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는 생각을 한다. 해보고 싶은 것은 그냥 해보는 나의 태도는 나를 믿어주는 것으로 표현된 엄마의 사랑이 맺은 결실 같은 것이다.
나는 선물처럼 받은 이 ‘믿음’을 나는 내 아들에게 주지 못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딱히 짚이는 곳이 없어서 시현이한테 다시 물었다.
“시현아, 너는 엄마가 너를 못 믿어주는 것 같아?”
“어? 엄마가 나 믿는 거 아는데요?”
“그럼, 왜 저번에 그런 질문을 했어? 엄마 좀 놀랐어.”
“아~~ 엄마, 그때 내가 너무 밖에 나가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히히히”
아들녀석의 뜬금없는 질문은 싱겁게 끝이 났지만, 덕분에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엄마가 나에게 주셨던 믿음의 가치를 알기에 나도 동일한 것을 아들들에게 주려고 공을 들여왔었다. 그럼에도, 돌이켜 내가 엄마한테 받은 그 믿음에 비교해보니 내가 아들들에게 준 믿음은 좀 초라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내게 주신 믿음은 내 재능과 기질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내 생명(life) 그 자체에 대한 온전한 신뢰였다.
나의 학창시절에 비해 느슨한 학교 생활을 하는 시현이의 미래에 대해서, 아직 읽고 쓰기와 기본 산수가 안 되는 시후의 미래에 대하여 불안감이 올라올 때 마다, 엄마가 내게 주셨던 그 믿음을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힘과 재능을 꺼내 사용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엄마의 그 지혜가 나의 인생을 이끌어 왔듯이, 아이들에 대한 나의 믿음도 그들의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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