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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킴 Sep 15. 2021

와이아푸 호수에 피어난 매화꽃

사랑하는 친구 애나에 대해 쓰다



Po karekare ana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Nga wai o Waiapu 
와이아푸의 호수는

Whiti atu koe E hine 
그대 건너간다면

Marino ana e
잠잠해지리다

E hine e Hoki mai ra
그대여 돌아와주시오

Ka ma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뉴질랜드 요양보호사, 나의 친구 애나(Anna)


우리나라에서 ‘연가’로 알려진 이 노래는 원래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의 노래였다. 현재 뉴질랜드 애국가 이전에 비공식적인 뉴질랜드 애국가였던 이 노래 'Po Karekare Ana'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군인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부르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고 한다. 노래의 아름다운 선율은 부드러운 마오리어와 유독 잘 어우러지는 느낌을 준다.  


며칠 전, 뉴질랜드에서 만나 절친이 된 애나에게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노래는 아들의 즉흥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거듭 들을 때마다 애나의 노래 소리는 새로운 울림과 감동을 선물해 준다. 따로 연습도 없이 즉흥적으로 부른 그녀의 노래가 그 어떤 훌륭한 가수의 노래보다 더 내 심금을 울리는 것은, 애나의 목소리에서 그녀의 삶을 향한 잔잔하지만 강인한 열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뉴질랜드에 이민 온 지 8년차인 애나는 노인 요양원에서 요양사(caregiver)로 일하고 있다. 


올해 8월 중순, 델타 변이 출현으로 뉴질랜드 전국이 록다운에 들어가자, 그가 일하고 있는 요양원에서도 외부에서 방문하여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중단되었다. 그리고 직원들과 시설 이용자들끼리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갑자기 애나에게 피아노 한 곡을 연주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애나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나가 악보도 없이 찬송가를 하나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피아노를 치다보니 마음이 뭉클 감동하여 한국어 가사로 노래도 함께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애나의 작은 체구에서 흘러나온 깊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에 요양원 사람들은 모두 말 그대로 깜짝 놀랐고, 비록 한국어를 모르지만 애나의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에 어떤 이들은 감동하여 눈물도 글썽였다. 


애나는 자신의 재능으로 무료하고 지루한 그분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활력과 즐거움을 선물할 수 있어서 기뻤노라고 했다. 가까이서 애나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준 것은 단지 그의 노래와 피아노 연주 실력만이 아니었을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체구도 작고 영어도 매끄럽지 않지만, 애나가 몰고 다니는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또 그들을 향한 그녀의 진심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애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했다. 애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의 직장에서의 활약이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녀가 이 멀고도 먼 타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해 온 그 노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이 작은 에피소드가 평범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피를 만들어내듯


결혼 후, 거의 전업주부로 살던 애나가 이곳에 와서 요양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다. 


사십 대 중반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가정 경제의 위기로 한국에서의 삶에 방향성이 보이지 않자, 애나네 온 가족은 무작정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탔다. 차분히 계획하고 준비를 해서 온 이민이 아니었기에, 애나 부부는 초반부터 생계를 해결하랴, 영어 공부를 하랴 몸이 두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정신없고 고달팠다. 


늦은 나이에 새삼스럽게 공부하는 영어가 쉬울 턱이 없었고,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대학 과정을 공부하는 것도 대학을 졸업한지 거의 30년이 다 된 애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과제의 마감일을 지키느라, 근처 캔터베리 대학교 도서관에서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매일 살다시피 했다. 공부만 해도 숨이 턱에 차오를 만한데, 일자리 두 곳을 나가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가정의 빈자리를 메꾸며 추가로 아르바이트도 해냈다. 일주일의 시간표가 쉬는 날 없이 빽빽이 돌아가서 아플 여유도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느 날, 애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그날 몸살이 심하게 와서 몸을 겨우 가누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날이었는데, 걱정이 된 나는 애나에게 좀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애나는 어떻게 일을 빠질 수 있겠느냐며, 진통제 두 알을 삼키고 집을 나섰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일하러 가는 애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애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씩씩할 수 있는가 물었을 때, 애나가 했던 말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해서 온 뉴질랜드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은 마치 몸 속의 피를 다 비워내고 새로운 피를 만들어 내는 일처럼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때로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힘들어도 결코 주저 앉을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처한 상황이라며, 혹여 가까스로 닫아 여며놓은 마음의 둑이 터져 속절없이 무너져내릴까 두려워서 울고 싶어도 울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울 수가 없다고 했다. 




매화꽃 같은 애나의 노래


작년에 내가 심하게 우울증이 걸렸을 때, 애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나와 함께 병원을 방문해 주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시간이 나는 대로 우리 집에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손수 만들어서 내가 밥 먹는 것을 챙겼다. 실의에 빠져 울먹거리는 내게, ‘지금은 죽을 것 같아도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다 지나갈 것이고, 비록 볼 수 없지만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며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소 식상할 수도 있는 이 위로의 말의 힘은 꽤 컸다. 그것은 철퍼덕 주저앉아 울고싶은 날이 허다하지만 결코 울지 않는다는 애나가 해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계획한 일이 틀어질 때마다 실망하기보다는 그것에 고집하지 않는 그녀의 유연한 삶의 태도를, 또 주어지는 상황에 감사하며 즐겁게 하루를 수놓을 줄 아는 그녀의 탁월한 삶의 실력을 목격하고 있었기에, 나 역시도 내 어려움을 떨치고 일어설 힘을 낼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여기 저기 흔한 꽃들을 볼 때마다 늘 새롭게 즐기는 애나. 부지런한 손길로 집안 곳곳을 꽃으로 채우고, 뚝딱 만들어 낸 맛있는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나누어 먹는 애나.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함을 간직한 애나는 마치 북풍한설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꽃 같다. 겨울 눈보라의 매서움 속에서도 그 고아함을 잃지 않는 매화꽃 마냥, 애나의 강인함은 고달픈 삶 속에서도 밝은 웃음과 맑은 노랫소리를 타고 퍼져 나간다. 



애나의 꽃꽂이, 그녀의 집에 갈 때마다 새로운 꽃들이 나를 맞는다


애나의 영혼의 맑음과 단단함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내 안에서도 뜨거운 그 무엇이 울컥 솟아오른다. 그 목소리의 떨림과 울림 속에는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터를 다지고 뿌리를 내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애나의 동의를 얻어 그 노래하는 모습을 올린다. 그녀의 노래가 어디에선가 삶의 힘든 때를 만나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Po karekare ana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Nga wai o Waiapu 

와이아푸의 호수는

Whiti atu koe E hine 

그대 건너간다면

Marino ana e

잠잠해지리다

E hine e Hoki mai ra

그대여 돌아와주시오

Ka mate ahau I te aroha e

너무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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