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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Mar 19. 2024

파리, 센강, 오후 8시 45분

고집쟁이는 교환학생 (9): 센강

파리는 희한한 도시다.


지하철과 하수구 가까이 가면 축축한 담배 냄새랑 노숙자들의 찌린내가 코를 찌른다.

그런데 조금만 걸어 나가면 갓 구운 빵에서 나는 따뜻한 버터 냄새와 니치한 향수 브랜드의 오크향 힌트가 설핏 느껴진다.


센강은 이중적인 파리의 집약체다.


곧 개최될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수영 경기가 센강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기겁했다. 이 더러운 물에서 수영을 한다고?

친구 한 명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가 선수였다면 무조건 기권했을 거라고 단언했다. 금메달 한 번 따겠다고 저 매캐한 물에 얼굴을 담그면 평생 피부병으로 고생할 거라며.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 헬스장을 다녔었는데, 여기 와서는 한 달권을 끊기가 애매했다. 아무래도 여행도 많이 다닐 건데 돈이 아깝기도 하고...

그래서 난 요즘 아침에 수업이 없으면 왼쪽 주머니에는 카드, 오른쪽 주머니에는 방 키를 넣고 센 강변을 뛴다.


난 유산소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다. 헉헉대며 뛰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심장이 턱에 올라오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히지만, 나중 가서는 다리 두 개에 자기들만의 자아가 생기고, 별생각 없이 달리게 된다.

별 생각이 너무 많은 내게 별 생각이 없는 건 정말 특별한 편안함이다.


잠실에 살았을 때는 석촌호수에서 뛰었다. 코스가 꽤 짧아서 한 바퀴 뛰는 데에 30분 정도 걸린다.

한 바퀴를 다 뛰어도 또 똑같은 뷰를 보면서 세 바퀴, 네 바퀴 뛰었다. 살을 빼려고 뛰었으니까.


센강에서 뛰는 건 확실히 그 시절보다 운동 효과는 없을 것 같다. 쉬지 않고 뛰기에는 너무 유혹이 많아서 걷다, 뛰다, 걷다, 뛰다 하게 된다.


하늘이, 반짝이는 윤슬이, 개와 산책하는 파리지앵들이, 에펠탑과 튈르리 정원과 오르세 미술관이 아름다워서 자꾸만 멈춰 서게 된다.



센강 앞에서 나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Gil처럼 정신이 빠지고 "휴고"의 휴고 까바레처럼 희망에 차고 "비포 선셋"의 셀린느처럼 추억에 잠기게 된다.


한강에 비해 깨끗하지도, 나일강에 비해 웅장하지도, 아마존처럼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정말 특별하다.


발자크, 사르트르, 안데르센,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이 그 강변을 걸어서일까?

루브르, 콩코드 광장, 그랑&쁘띠 빨래의 건설이 이루어질 때에도 그 자리를 지켜서일까?

유명한 영화와 책들에 등장해서일까?


결국 특별함은 내가 부여하는 거겠지.




요즘 난 재밌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의 나는 각자 너무 다른 색으로 존재하겠구나, 하는 생각.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는 시끄럽고 기 빨릴 정도로 명랑한 중학생, 누군가에게는 낯가림이 심해서 묻는 말에도 머리카락을 넘기며 어색하게 대답하는 새내기 후배.


어떤 사람한테는 놓쳐서 아쉬운 여자,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이기적인 나쁜 년.


내가 잘 못 대해줬던 인연들에게 고마웠다고, 그때는 내가 어리고 잘 몰라서 미안했다고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이미 나와의 일을 토대로 스스로 잘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멋진 경험들을 하고 있으리라는 걸.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요즘따라 왜 이렇게 혼자 있고 싶지?


올리브랑 소금이 들어간 다크초콜릿, 그리고 코크 없이 열 수 있는 작은 샤도네이 한 병을 샀다. 뚜껑을 열고 달달한 화이트 와인을 한 입 머금어봤다.

와인 혼술, 별 거 아니네!


센강에 앞에 앉아서 무척 깨끗해진 물결을 내려다본다. 이제는 물비린내도 별로 안 난다! 브런치를 켜 글을 써 내려간다.


매캐할 때도, 낮에 푸를 때도, 밤에 반짝일 때도 항상 센강은 센느 강인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의 파편 속 나도 항상 나였을 것이다.


결국 과거로 돌아가서 사과를 할 수도, 사과를 받을 수도 없는 나는 그 대신 상처 줄 정도로 악했고 상처 받을 정도로 약했던 나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더 아끼기로 다짐했다.


글을 다 쓰고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이 캄캄해졌다. 30분만 있으면 에펠탑이 반짝이겠지? 타자를 멈추고, 음악 소리를 키우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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