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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Apr 09. 2024

파리, 나 권태기야...

고집쟁이는 교환학생(14): 카페테라스, 마레지구 

책을 읽을 때 내 변태 같은 버릇 두 가지.   


1. 구매 직전, 읽는 중, 다 읽은 후에 꼭 코 근처에 갖다 대고 킁킁댄다. 

(이럴 때면 인간도 결국 동물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중학생 때 부부들의 공통점을 연구한 다큐멘터리를 봤었다. 호르몬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스럽게 유전적으로 조합이 좋은 이성의 냄새에 유혹당하고, 결국은 그런 이성과 짝이 된다는 결론. 아무리 내용이 좋거나 교양 있더라도 난 냄새가 내 취향이 아니면 결국 안 읽게 되던데…)


2. 읽던 중 정말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전개가 보이면 지금까지 읽은 분량은 왼손, 앞으로 읽게 될 페이지들은 오른손으로 잡고 둘을 비교한다. 

(왼손의 두께가 더 얇으면 신난다. 오른손의 두께가 더 얇으면 서운하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4월이다. 2024년이라는 책의 1/4, 내 교환학생 생활이라는 책의 중간 지점. 얇아져가는 오른손의 두께가 원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처음 파리에 왔을 때 난 눈에 콩깍지가 껴서 별 것도 안 해도 이 도시가 사랑스러웠다.


신호등 키가 왜 이렇게 작고, 왜 신호가 연두색이야? 귀여워!

공원에 거위랑 까마귀가 돌아다닌다고? 흥미로워!

24시간 편의점도 없고, 가게는 웬만하면 8시에 문을 닫네? 감질나!


그리움은 애정을 증폭시킨다. 

시험 일정 때문에 거의 3월 내내 파리랑 동거하다 보니, 그리움을 느낄 새가 없었고 내 열정적인 구애는 점점 냉소적인 시니시즘으로 변모했다.


그래도 4월이다.

파리에게서 안 보이던 매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벚꽃이 만개하고, 파리지엔느들의 옷차림에 더 개성이 묻어나고, 그리고 테라스가 열린다.




S와 파리의 성수동, 마레지구에 있는 카페테라스에서 디저트랑 음료를 시켜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한국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 여행지를 어디로 할지 정하는 중인데, 북미가 너무 가고 싶은 거야. 캐나다랑 미국을 두 주 정도 돌고 싶은데... 유럽에 있으면서 미국 가는 거 이상한가?”

“어… 그러게! 아직 유럽 국가들도 다 돌지는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북미가 왜 가고 싶었어?”

“언니, 나 유럽 조금 질린 것 같아.”


S는 특유의 매력 있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빨간색 과일 스무디의 마지막 입을 마저 넘겼다.


“어딜 가든 분위기가 조금씩 비슷하게 느껴져. 엄마는 학기 끝나면 니스 쪽 어학원에 등록해서 두 달 정도 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와도 된다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안 끌릴까?”


나보다 한 학기 먼저 파리로 온 그녀도 더 이상 연두색 신호등과 청둥오리에서 신비감을 느끼지 못하고, 8시에 문 닫는 슈퍼마켓에게도 짜증을 느낀다.


“언니가 저번에 밥 값 더 냈으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아니야, 그런 게 어딨어.”

“이번에 내가 내고 싶어. 다음에 또 보자.”


거의 반강제적으로 녹차 치즈케이크를 얻어먹고 마라탕 집까지 바래다준 후 다시 집으로 걸어갔다.


우리 동네에 거의 도착해서 사과를 사려고 마트에 들어갔는데, 내 빨간색 장지갑이 없어졌다

머리에 피가 쏠리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행보를 곱씹었다. 분명히 S가 결제를 하려고 할 때 내가 만류하며 지갑을 꺼냈던 것 같은데...

발걸음을 재촉해 자취방으로 거의 뛰다시피 하며 들어갔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문을 박차고 신발을 대충 벗고 책상 위를 봤는데, 내 지갑은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뒀던 위치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망각하는가,


예전부터 권태기라는 말을 좋아했다. 

"지금은 네가 싫어, 그런데 난 나중에는 네가 다시 좋아질 걸 확신해." 하는 귀여운 투정으로 들린다.


파리, 나 권태기야... ( =파리, 네가 너무 좋아.)

케밥집에서 풍기는 향신료 냄새도, 비가 왔을 때 축축하게 젖은 내음도, 골목마다 있는 꽃집에서 나는 향기도 자꾸 킁킁대게 된다. 


에펠탑 바로 아래의 공원 벤치에서 글을 쓰다가 이제는 익숙한 "꿰엑" 소리가 들려 발치를 쳐다보니, 내가 그렇게 신기해했던 오리가 관심을 구걸하고 있었다.



오늘은 던져 줄 빵쪼가리는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처음처럼 네 뒤뚱거림과 이상하게 생긴 눈을 오래 바라봐줄게,

그리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처음보다도 더 좋아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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