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에 아이가
“엄마 나 고백할 게 있어.” 한다.
사실 학교에서 사회 시험을 봤는데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통? 을 받았다고
매우잘함/ 잘함/ 보통/ 노력요함 의 순서인데.
아이 딴에도 이런 결과를 받은 것이 좀 불편한 모양이다. 초등학교의 시험은 못 보는 게 이상한 시험으로 인식이 되었다. 사회 시험이 본 적 없이 어려웠다고 한다.
웬만해선 매우 잘함을 받는 학생부인데 모두 보통을 받았다고?
“선생님이 시험 본다고 말씀 안 하셨어?”
“사회 수업 시간에 잘 안 들었어?”
열심히 들었고
사전 공지도 해 주셨다.
4명의 아이는 매우 잘함 을 받은 것을 보니
준비했다면 잘할 수 있는 적정난이도가 아니었을까 유추해 본다.
‘학교생활을 충실히 해야 한다 ‘
‘수행평가가 쉬워도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를 책 원고에 넣어두었는데…
현타가 온다.
내 아들이나 잘 가르칠 것이지 남에게 뭘 하라는 건지
“다음엔 시험 본다고 하시면 교과서를 집에 꼭 가져와. 엄마가 한번 봐줄게.”
예전 같으면 아이를 나무라기만 했을 텐데. 너는 왜 학생이면서 너의 본분을 다하지 않느냐는 둥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귀담아들으라는 둥 똑같은 레퍼토리를 돌렸을 나이다.
아이의 교육과 관련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바뀐 생각이 하나 있다.
많이 실패해 보자 라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 번에 잘할 거라 기대만 컸던 지난날 나의 닦달은 정말 미안했다. 많이 실패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이 배우자. 그래서 어느 날 한 번쯤은 성공한 것으로 성공한 사람의 정체성을 갖자.
시험을 준비할 줄 모르는 아들에게는
시험 준비를 가르친 적 없는 엄마가 있었다.
아이와 싸우기 싫다는 핑계, 자기 주도를 가르친다는 핑계, 이제는 다 컸다는 핑계, 엄마도 할 게 있다는 핑계로 아이 학교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곧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이다.
5학년의 말미부터는 익혀야 하는 습관들을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선행은 아이 머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밖에는 못한다. 말 그대로 억지로 시킬 수가 없게 커버렸다.
그러나 태도는 끊임없이 될 때까지 엄마가 가르칠 수 있다.
다른 경쟁자를 모두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정으로 하나둘씩 그만둘 때에도
성실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게 자연스러운 아이로
키워내고 싶다.
11월 어느 주말, 내가 나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아이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