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ESTA Apr 14. 2021

아무런 생각이 없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


이번 글을 쓰면서 생각과 기억을 끄집어내는 시간과 과정이 참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맹목적으로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나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든다고만 생각했기에 그즈음의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말 그대로 그때의 나는 정말 맹목적으로 죽음만을 생각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분한 망상 같은 것이 떠오르곤 했고 내가 죽음으로써 나를 조종하는 누군가는 재미를 잃겠지. 그리곤 자유가 되겠지. 뭐 이런 정말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그저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으니까.


내가 있던 병실은 6인실 중 5인은 모두 할머니들이었는데 몸이 불편한 할머니들 대신 식판도 날라드리고 병문안 오면 먹을 것들도 나눠드리고 하여 나름 기특하게 여겨 주신 것 같다. 하루는 마주 보는 침상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양산 통도사에 머물 적 꽤나 오래 사주 공부를 하신 분이라며 나에게 이름과 생시를 물어보셨다. 처음엔 호기심의 미소 같은 것을 살짝 띄셨던 것 같은데 갑자기 턱을 괸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긴 거랑 달리 살면서 고비가 많았네. 죽을 고비도 있었고. 근데 덕을 많이 쌓아서 잘도 피해간 모양이다."


라고 하시면서 앞으로의 대해서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보통 사주라면 인생을 얼마만큼 기점으로 나누어 알려주곤 하던데 왜 할머니는 그 뒤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까. 그러곤 이내 예쁘니까 잘 살거라 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병원 옥상정원


나는 머리가 아프면 자주 병원 옥상정원을 올라가곤 했다. 높은 곳이라 아래가 훤히 보이는 통창은 고소공포증이 있던 내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햇으며 그저 정원 옆 관리하는 건물에 옥상보다 조금 더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만 내내 눈에 들어왔다. 


나름의 계획이었다. 나름의 탈출구였다. 


가족, 친구, 지인들이 병문안을 오곤 했다. 어떤 친구는 나의 발작을 처음 보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친정엄마처럼 챙겨 오기도 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유치원에서 간식 담당할 때 거래하던 떡집 사장님과 연락 중 입원 중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떡을 해서 병원에 병문안을 오신 것. 나는 이제 더는 그곳의 교사도 아니고 사장님과 간식을 거래할 일도 없는데 왜 이런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걸까. 사장님께서 가져오신 떡은 금방 해오셨는지 따끈따끈해서 같은 병실과 간호사 선생님 및 물리치료실 선생님까지 드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데 왜 그때는 그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그저 나라는 사람에게 정말 힘을 주고 싶으셨던 그 마음을 왜 나는 이까짓 나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사장님의 정성과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다니게 해버린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생각나는 것은 집에 있는 반려견 동글이었다. 밥은 잘 먹는지, 나를 찾지는 않는지, 피부가 좋지 않은데 목욕은 누가 시켜 주는지 등. 아무리 가족이 있다지만 나만큼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맘이 쓰였다. 어느 날은 자려는데 너무 보고 싶어서 새벽에 잠깐 택시라도 타고 가서 보고 올까 이런 생각도 하는가 하면 동생에게 부탁해서 병원 앞으로 데려와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집으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때가 겨우 사흘 정도 되었을 때였는데.





그즈음 상대방 보험회사에서 아빠를 만나서 합의에 대해 협의를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마침 아빠가 자리에 없고 할머니들께서는 치료실에 가시는 등 혼자 있던 날이었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내게 내 이름을 물으며 본인이 맞는지 확인을 했다. 순간 스위치가 눌렸다.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고 소리가 왜곡되어 들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온몸이 벌벌 떨리면서 끝없는 롤러코스터 하강을 하는 시간. 그렇게 잔뜩 웅크리고 눈물을 뚝뚝 흘릴 무렵 아빠가 돌아왔다. 그 사람은 당황했고 내 모습을 보자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듯하다. 아빠는 또 잔뜩 화가 난 투로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그날 물리치료도 가지 못한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곤 그날 저녁 또 옥상에 올라갔다. 이번엔 사다리 앞까지 가보았는데 스무 칸 정도 올라가면 조용히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 기웃기웃하고 있는데 마침 엄마가 왔다. 병실에 없기에 여기 있을 것 같았다며. 그런 엄마를 보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정확하게 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삶을 쉽게 포기한 어떤 죄책감은 아니었고 전해야 할 것이 있었을 텐데 너무 무책임하지 않았나 라는 그런 죄책감. 


이런 일상은 지속하였다. 병원 밥은 정말 맛이 없었고 반려견이 보고 싶고 그마저도 그만두고 싶은 나날들. 아빠는 사고 당시 가해자와 했던 얘기를 불쑥 얘기했는데 가해자가 왜 신호 위반을 했냐고 물으니 초행길이라서 그랬다고 한다. 아빠는 혀를 끌끌 차면서 뭐 그런 사람이 있냐며 이야기했고 그 후에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니 '본인의 동네는 신호등이 형광등인가보다' 라든가 '초행길에 신호 위반 할 거면 도대체 사고를 몇 번 낸 사람일까'라는 등의 조롱 섞인 위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초행길인 사람이 속력을 그렇게 내서? 게다가 그 새벽 시간에?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았던 경찰관의 말. '아가씨가 핸들 안 틀었으면 차 뒤집어졌겠네' 모두가 모순투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사람들이 싫어졌다. 질렸다. 새로운 사람. 가식적인 인사. 서로에 대한 모호한 경계, 의심 모두가 싫었다.



퇴원이 가까워질 수록 겁이 나기 시작했다.
또다시 경찰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구독자 중에는 전혀 모르는 분도 계시고 지인 및 친구들이 있기도 합니다. 지나간 일을 괜히 꺼내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뇔 때가 많기도 하지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저를 쓰기 위해 최소한의 일들이라도 적고자 합니다.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외딴글)서산 유기방 가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