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400만이 넘는 스코어를 달성했다. 그 말인즉슨 이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은 볼거리가 분명 존재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황정민과 이정재. 사실 두 배우가 주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예고편에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예고편에서는 두 남자의 대결에 초점을 둔다. 처절한 암살자 황정민과 무자비한 추격자 이정재의 하드보일드 추격액션이라는 키워드 문구는 <신세계>앓이를 했던 팬들에게 쏟아진 단비와도 같으며 무더운 8월, 목마른 극장에 시원한 쾌감을 선사할 명분이 되었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 영화의 무드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황정민이 방콕으로 가기 전까지 일어나는 일본에서의 은둔 생활, 과거로의 플래시백, 아이가 납치되는 방콕에서의 사건은 절제된 카메라 샷과 해외 로케이션에서 뿜어내는 이국적인 향수를 통해 이 영화의 개성을 선전포고한다. 이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홍경표 촬영감독의 앵글이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차가운 푸른빛 색감, 방콕에서의 노란빛 색감은 다양한 로케이션에서 묻어나는 그 공간의 공기로써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또한 한국과 일본 로케이션에서는 픽스 앵글을, 방콕 로케이션에서는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무빙 앵글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마치 다른 감각의 영화인 것처럼 표현한다. 이러한 앵글에 담긴 스톱모션과 슬로우모션을 활용한 액션은 한국 액션영화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쾌감을 선보인다. 가령 이정재가 방콕에서 처음으로 칼부림하던 창고 씬과 두 남자가 처음으로 만나 좁은 복도에서 대결을 펼치는 씬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을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컷들이 주는 이질감을 다소 느꼈고 <악녀>에서 느꼈던 신선함과 <모가디슈>에서 접했던 완성도에 비해 치밀하게 구성된 밀도는 전체적으로 아쉬웠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곳은 방콕이다. 방콕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나지만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는 당연 박정민의 트랜스젠더 역할이다. 영화는 개봉 전까지 박정민이 트랜스젠더 역할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으며 개봉 후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마케팅이 되었다. 충무로의 블루칩을 넘어 이제는 명배우 반열에 오르게 된 박정민의 이색적인 모습은 그야말로 볼거리 그 자체였다. 실제로 영화의 평을 보면 황정민과 이정재라는 대선배들보다 박정민의 연기 호평이 주를 이룬다. 박정민의 연기는 나무랄 때 없이 훌륭했다. 하지만 박정민이 소화한 트랜스젠더라는 역할이 이 영화에 꼭 필요했냐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박정민은 황정민에게 고용당한 가이드일 뿐이다. 자신의 아이에게 잘해주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박정민이기에 황정민의 아이를 파나마에 데려가야 하는 명분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라는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심지어 박정민의 아이에 대한 히스토리가 대사 몇 마디로만 설정되어 위에서 언급한 명분에도 발만 살짝 담그는 셈이 된다. 박정민은 오로지 수술을 위해 돈을 좇는 사람이기에 남의 아이를 위한 야트막한 윤리 앞에 쉽게 무너지는 물욕이 납득되지 않는다. 결국 박정민의 트랜스젠더 역할은 다채로운 볼거리를 위해 배우에게 색다른 탈을 쓰게 한 수단으로 소모되어 아쉽기만 하다.
이 영화를 언급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내러티브의 불친절함이다. 위에서 언급한 트랜스젠더 역할과 더불어 “영화니까”라는 이유로 해결되지 않는 설정도 많고,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황정민과 이정재의 구도에 대한 모호함이다. 이정재는 한 마리의 독사 같은 이미지를 뽐낸다. 한번 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놓지 않을 것 같은 무자비한 캐릭터가 황정민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갈 빈틈을 마련한다. 마치 “영화니까” 정해진 결말을 위해 일부러 놓아준 것처럼. 또한 이정재는 황정민을 능동적으로 쫓는 존재이지만 황정민에게 이정재는 눈 밖이다. 황정민의 목표는 그저 아이를 살리는 것이지, 이정재를 물리치고 아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즉, 황정민에게 이정재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아닌 수많은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과연 이정재가 예고편에서 말하던 “두 남자”에 속할 만큼의 비중 있는 역할인지 아니면 그저 찬란한 외형을 지닌 간헐적 장애물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고, 결국 이정재의 역할이 갖는 목적성이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모로, 특히나 내러티브 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만의 매력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해외 로케이션의 향수, 스톱모션을 활용한 액션 그리고 이정재의 날카로운 눈빛 등. 그중에서도 빛나는 건 홍경표 촬영감독의 앵글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공부를 하는 영화학도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이다. 누군가 내게 좋은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기억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 영화의 몇 장면들이 있다. 정말 죽이는 앵글들.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극장가에 활력을 넣어준 고마운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개봉하지 못하고 있는, 보고 싶은 영화가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