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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김 Oct 07. 2023

분명 위대한 대작이었는데...

퇴고에 관하여

  내가 생각하기로, 작품이 가장 위대해 보이는 순간은 바로

  작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을 때다.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작품이 초고가 되어 나온 순간, 대작은 개뿔! 구려! 너무 구려서 내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분명 대작이었는데...

  A4용지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보지만,

  그걸 쓴 것도 나. 수습할 인간도 나뿐이라는 아득함과 마주할 뿐이다.

  이쯤 되면 김김 자아가 걸어나와 쓰러져 있는 김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일어나. 일어나서 빨리 고쳐."

  

  어린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밭 맬래? 애 볼래?' 하면 밭 맨다고 하는데, 글 쓰는 사람에게 '퇴고할래? 새로 쓸래?' 물으면 아마 열에 여섯은 새로 쓰겠다고 할 거다. 글쓰기에서 퇴고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 또 있을까? 김연수 작가님이 '소설가의 일'에서 퇴고를 두고 토할 때까지 고치라는 거라고 말한 걸 보면 기성 작가나 망생이나 토고 아니 퇴고가 싫은 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 퇴고라는 말에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 글을 다듬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탓에 교정, 교열을 두고 퇴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예, 이것도 접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초고의 문장을 다듬고, 문단 배열을 새로 하고, 구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 정도를 '퇴고'라고 생각했다. 가끔 어떤 사건을 빼고, 그 자리에 다른 사건을 바꿔치기 하기도 했는데, 그 정도의 퇴고도 힘들어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낫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곤 했다.


  많은 기성 작가님들이 한 목소리로 작가는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잘 고치는 사람이라고 할 때마다 나는 먼산을 바라보며 '그냥 처음부터 잘 쓰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주제 파악 못 하는 소리를 해댔고,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어떻게 쓴 초고인데!' 하며 원고지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다.


  작품을 여러번 다시 쓰는 걸로 유명한 정유정 작가의 일화가 사실 기성 작가들 사이에서는 희귀한 케이스가 아니란 것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초고를 버리고 새 문서를 연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반짝반짝한 문장과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저 초고를 버리고 어떻게 새로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내 영역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원래 문서 위에서 떼우고 기우고 자르고 붙이고 바르고 덧바르다가...


.......떨어졌다.


   그렇게 쓰다가는 언제까지나 떨어지기만 할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운명의 날로 기억한다. 기억에 관한 단편을 써놓고서였다. 왜 어떤 기억은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지우지 못하는 걸까 하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기억'이라는 요소 때문에 등장 인물을 세포들로 정했다. 세포가 기억 필름을 들고 해마에 갔다가 전두엽에 갔다가 생 난리를 친다. 관리자 세포는 끔찍한 기억을 저장할 수 없다고 필름을 든 기억 세포를 돌려 보내고 여기저기 쫓겨다니던 기억 세포는 우여곡절 끝에 기억을 저장하는 데 성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무리수 같았다.


  아무리 동화라도, 아무리 SF와 판타지에 거부감이 없는 아이들이라도 세포가 말을 하고 싸우고... 이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초고를 출력해 놓고 혼자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몇 년 뒤, <유미의 세포들>이란 아주아주 훌륭한 작품을 보고 나는 아무도 없는 내 방에서 조용히 큰절을 올렸다. 나 스스로 창작에 한계를 둔 지난날을 반성하며. 그리고 내가 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는 세계를 보여준 창작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무튼, 그날 나는 도저히 세포들 이야기를 합평에 가져갈 수가 없어서 등장인물을 사람으로 바꾸기로 했다. 과학자와 의사, 경찰관, 아동심리전문가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다시 썼다. 초고에서는 '주제'와 주인공이 겪은 짧은 '사고' 말고는 건질 게 없었다.

  이렇게 두 번째 원고가 탄생했는데, 이번에는 등장인물이 많아 산만한 느낌이 있었고, 사고의 기억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채택한 AI 복원 기술 등의 설명이 너무 복잡했다. 세포의 유치함을 피하려다가 이번에 짜증을 유발할 것 같았다.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 등장 인물을 과감하고 줄이고, AI 과학 기술 대신 작가 시점의 힘을 빌렸다. 몇 번의 버전을 더 시도한 끝에 나쁘지 않은 버전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나도 다시 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여러번 고칠수록 작품이 좋아진다는 확신을 가진,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 뒤로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다시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초고는 긴 메모'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는 초고가 곧 최종본이란 마음으로 처음 쓸 때부터 여러번 문장을 고쳤는데 (그래서 더 초고를 버리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아까운 문장이 너무 많았던 거다.) 지금은 일단 내가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지 적고 보자는 마음으로 후루룩 써내려 간다.






고백하는데, 현재까지 올린 브런치의 거의 모든 글은 아직 퇴고를 하지 않았다. 가끔 라이킷이 달릴 때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작가 지망생이라고 밝힌 게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오탈자야 애교로 봐준다 쳐도, 발문(리드문)과 본문의 내용이 전혀 안 어울린다거나, 뜬금없이 종결하고 토낀다거나 문단과 문단의 연결이 어색하다거나....

이러니까 떨어지지!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 하지만 본업에서는 좀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봐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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