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공포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나른한 날이었다.
수업은 일찍 끝났고, 복학생과 놀아줄 후배는 없었고,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는 죽어도 하기 싫었던, 그런 날이었다. 억지로 도서관에 가봤지만 봄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꾀가 살곰살곰 올라와 책 몇 권만 빌리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한낮의 주택가는 쓸쓸한 정도로 조용했고 빈집은 고요했다. 가끔 뒷집 넘어 이면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만 정적을 깰 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골목길을 뛰는 아이의 발소리, 예고 없는 방문에 컹컹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 길고양이의 가르랑 거리는 소리, 날벌레들의 웅웅 거리는 날갯짓 소리, 엄마 냄새 가득 밴 침대 속으로 날아드는 이 아득하고 나른한 모든 소리가 가만히 잠 속으로 이끌었다. 자야겠다. 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과제는 약간만 미뤄두고 이제 자야겠다.
풋잠이 설핏 들었나,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몽롱한 때에 누군가 방문을 여고 들어왔다. 맨발로 바닥을 디디는지 차박차박 소리가 났다.
‘동생인가?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난다고 했던가?’
차박차박 발소리는 침대 발치에 멈추었고 끄트머리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이상했다. 동생이라면 내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냥 자신의 방으로 갔을 텐데, 세상 무뚝뚝한 오빠는 더더욱 문도 열어보지 않았을 텐데, 출근하신 부모님이 오셨을 리 만무한데. 내가 들어오면서 대문을 안 닫았던 건가? 난 범죄의 희생양이 되는 건가? 그 와중에 참 많은 생각을 했나 보다.
그런데 갑자기 다리 쪽 침대 매트가 쑥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걸터앉아 있던 그 누군가가 침대로 올라온 모양이다. 진짜 이상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보았다.
아뿔싸! 늦었다.
이미 난 가위에 눌렸다. 몸을 움직일 수도, 작은 신음 하나도 낼 수가 없었다.
침대에 선 그는 곧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저 가볍게 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공중에 붕 띄웠다가 밑으로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움직임에 따라 내 몸은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리기 시작한 소리가 있었다. 찢어질 듯 깔깔대는 웃음과 굿당에서 들릴듯한 신들린 요란한 방울 소리. 그가 뛸 때마다 들썩이는 몸과 귀가 찢어질 듯 들리는 웃음소리, 방울 소리…….
그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들었던 가위에서 풀리는 모든 방법을 다 해봤던 것 같다. 무조건 일어나려고 온 힘을 다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위는 풀렸다. 식은땀 범벅이 되어 방을 둘러보니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난 매무새를 다듬을 시간도 없이 집에서 뛰쳐나왔다. 무작정 사람이 많은 곳으로 걸었고, 어둠이 내려앉아 밖이 더 무서워졌을 즈음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동안 가위에 안 눌려본 건 아니었다. 예민하고 신경을 과하게 쓰는지라 스트레스를 받거나 너무 피곤하면 가위에 종종 눌리긴 했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안락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한순간에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날의 공포는 사실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그 당시 IMF 여파로 1년을 휴학하고 복학을 해보니 친구들은 모두 졸업하고, 남은 건 후배들 뿐이었다. 중학교 시절 특별한 담임 선생님 덕분에 소심했던 성격은 다소 외향적으로 바뀌었고, 과대표를 하고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알고 지내던 선후배가 많았기에 후배들과 공부하면서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신경을 계속 쓰게 했던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는 현대문학 시간의 소설 창작이었다. 난 소설 창작에서도 후배들에게 밀리기 싫었다. 뭔가 더 뛰어난 글, 신선한 소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낸 소재가 무당이었다. 점 한 번 보러 간 적 없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경험이 없었기에 학교 도서관에 있던 무당 관련한 책은 모두 섭렵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전산실에 앉아 더딘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 모아두었다. 책상에도, 가방에도 눈길이 닿는 곳엔 무당에 관련한 책과 자료들이 산더미였다. 그렇게 난 내 생활의 일부를 무속에게 내어주고 있었다.
후배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그 강막이 하나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그 골몰함이 아마도 날 공포로 몰아넣은 것 같다. 간접적인 지식으로 다른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과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야겠다는 자만과 돋보이고 싶은 탐욕이 눈을 가렸다. 나를 나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자만이 평생을 잊지 못할 공포를 준 것이다. 지금은 헛웃음 나는 것들이 그때는 그렇게 절실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