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키즈>의 두 예술가처럼
예술에 있어 세계를 구축하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 세계는 나 혼자만의 경험과 깨달음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누군가를 만나며 확장되기도 한다.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단한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언제든 편히 쉬고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 삶은 참 아름답고 순수할 것이다.
<저스트키즈> 속 패티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관계가 그랬다. 뮤즈이자 연인, 친구였던 이들은 함께 있을 때 이들만의 세상에서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자신이 꿈꾸는 언어를 아무 설명 없이도 이해해 주고 함께 읽어 나가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행운인가. 그들은 서로의 존재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함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날은 그가 시험 준비에 돌입한 지 막 2주가 되던 날이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 말을 뱉기 전에 우리는 영국이 그립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요즘 한창 영국이 그리워지던 참이었어. 여행보다는 길고, 삶이라기엔 찰나 같던 그런 시간, 내게 영국은 그런 곳이었어. 그런 곳에 너와 함께라서 얼마나 좋았는지. 그건 여행과 동거 그 사이의 무언가였어. 우리는 자주 다퉜지만 또 자주 환호했지. 버킹엄 궁전의 교대식과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찰랑이는 야경을 보고 설레었다가 겨우 수건 한 장 따위로 다투는 우리의 나날이 참 우리다워서 좋았는데.
"응? 뭐가? 너 혹시 영국에 혼자 가려는 건 아니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고..."
"나 그냥 적당히 해보다가 정 아니면 시험 보지 말까 봐."
"음.. 그래 그럼!"
대답을 끝내고 나는 재빨리 먹던 샌드위치를 들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조금이라도 일그러진다면 그는 상처받을 터였다. 함께했던 여행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장 태연하게 대답을 하고 가장 태연한 방식으로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정말 괜찮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혹여 내가 실망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내 표정을 살피던 그는 그제야 안심한 듯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시작한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나와 가끔 만나 밥 먹고, 수다 떨고, 그냥 그렇게 지내다가 그냥 그렇게 취직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내가 회계사 안되어도 상관없어?"
"당연하지 그럼. 상관없어."
언젠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직업 없이, 꿈도 없이, 그런 사람이면 어떻겠냐고. 그때 그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말하는 상관없음은 어디까지의 상관없음일까. 문득 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직업이 떠올랐고, 나는 나와 그 직업들의 상관관계를 따지기도 전에 그들에 순서를 부여하고 대진을 짰다. 별안간 우리의 <이상형 배우자 직업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피아니스트와 화가 중엔 누가 좋겠어? 그가 항상 피아노에 아쉬움을 가져온 걸 나는 알고 있다. 역시 그의 답은 재볼 것도 없이 피아니스트였다. 집에 돌아와 하루종일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그게 그렇게 평화로울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입에는 벌써 미소가 지어있다. 그럼 교수 대 교사는? 교사 부모님을 둔 그는 방학도 있고 저녁도 있는 교사 워라밸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교수의 지적인 위엄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며 교수를 택했다.
무용수와 헬스 트레이너 중에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용수를 고른 건 의외로 무용수의 우아함이나 몸에 밴 섬세함과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딱 붙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인스타그램 홍보용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니 영 안될 거 같다는 게 이유다. 언제 거기까지 생각한 건지. 다음은 약사와 변호사. 최고의 난제였다.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가 수없이 자기의 말에 반박해 가며 겨우 내린 결론은 약사다. 변호사의 명성을 포기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와 함께 더 많은 저녁 시간을 보내줄 것만 같은 약사의 남편이고 싶단다.
그의 로망은 어쩜 이렇게 구체적일까. 모든 직업에 되는 이유와 안 되는 이유가 명확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불현듯 튀어나와 흐지부지 사라졌고, 때문에 나는 이 월드컵의 우승자가 누구인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상관은 없다.
내가 없는 그의 세계에 그가 어떤 원칙을 두고 있던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면 그의 모든 복잡한 원칙들에서 나는 늘 예외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10년 후 너와 나는 오늘 우리가 언급한 직업 중에 하나를 갖고 있을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각자의 세계에서 서로와 무관한 시간을 보낸 후에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누워있는다. 이때 우리의 대화는 우리가 무얼 하든 간에 종종, 아니 자주 산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떠난 수많은 여행 속 현실과 동떨어진 나날들이 있기도 하고, 형편없는 상상이나 싱거운 가정들도 있다. 그렇게 끝도 모르고 넓어져가는 우리의 세상 안에서 우리는 뭔들 못할 게 없다. 이 널찍한 세상 안에 우리는 우리만으로 충분하다. 상상이 걷히고 먼 꿈의 이야기가 한순간에 현실의 손가락질로 사라졌을 때, 남아있는 게 서로라서 우리는 안심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우리의 자그마한 보금자리로 돌아와 침대를 정리하고 꼭 껴안은 채 행복한 잠에 든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