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이터널 선샤인>
<지선씨네 마인드> 요즘 가장 꽂혀있는 프로그램이다. 박지선 교수와 나의 영화 취향이 얼마나 잘 맞던지, 마침내 내가 몇 년간 사랑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소개되었을 때는 패널들이 말하는 한 문장 한 문장에 공감했다. 그들이 꼽는 영화 속 최고의 명대사가 나의 것과 같았을 때는 이 영화가 마침내 나의 철학, 나의 가치관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enjoy it"
그냥 즐기자
배우 엄지원은 이 대사가 사랑도, 우리의 인생도 모두를 관통하는 말이라고 표현했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힐 때는 그냥 내버려 두고 즐기는 것. 마음을 내팽개치고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적은 후회를 남기는 방법이다. 마치 주문 같기도 한 이 말을 직접 되뇌었던 그때가 문득 떠올랐다.
1월의 차가운 런던 플랫. 묵직한 캐리어 두 개를 옆에 두고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어젯밤 참고 참아온 감정이 터져버려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은 후였다. 사실 진작에 이렇게 됐어야 마땅하다. 그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를 무려 일주일씩이나 참아온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 우리는 이 소중한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약속을 세웠다.
<내가 너에게> - 아무리 바쁘고 들떠도 소홀해지지 않을 것
<네가 나에게> - 아무리 화가 나도 상처 주는 말을 하지 말 것
하지만 몇 개월 만에 이 약속은 깨져버렸고, 6년간 함께 쌓아 온 신뢰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우리는 결국 이별을 합의한 채 유럽 여행을 함께 하게 됐다. 이미 예약까지 완료한 여행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게 명시적인 이유였고, 결코 짧지 않은 우리 관계를 전화로 마무리할 수는 없으니 함께 아름답게 끝내고 싶다는 게 그의 이유였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게 어디 있겠나 싶었지만)
막상 오랜만에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 좋으면서도 나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 그가 너무 미웠다. 여전히 나를 좋아하지만 나에게 실망한 마음과 바닥난 기대감으로 반드시 헤어져야겠다는 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채로 런던 여행을 이어온 지 일주일, 참고 참다 결국 오늘 터져 버린 것이다. 하필 또 오늘은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지난밤 상대에게 받은 상처를 필사적으로 티 내려는 우리였다. 25kg의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가는 나를 열 발자국 앞서나가던 그가 이따금씩 뒤돌아 볼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모른척했다. 남들이 보면 이해하지 못할 애매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세인트 판크라스 역에 도착했다.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내 몸만큼 커다란 캐리어를 홀로 검문대 위에 올리는 그 순간부터인가, 아니면 빠르게 앞서가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는 내게 생판 모르는 젊은 신사가 '서두를 필요 없어' 라며 다독였을 때부터인가. 아침에 강렬히 느꼈던 그에 대한 분노는 서서히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파리 북역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숙소에 갈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어느덧 그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익숙한 듯 혼자서라도 꾸역꾸역 찾아가려는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뭐 하자는 거야. 그럴 거면 숙소까지 따로 가." 먼저 간 건 자기면서.
영국과 모든 게 다른 낯선 파리에서 나는 캐리어와 손에 든 가방, 백팩을 몸에 밀착시킨 채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이 캄캄했던 것도 잠시 파리는 생각보다 다정했다. 지하철 출입구에 뚱뚱한 백팩이 껴 옴짝달싹 못할 때는 지나가던 두 남자가 자기의 교통권을 써가며 나를 구출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파리 지하철 계단에서 좀처럼 내려가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열차 앞까지 캐리어를 옮겨 준 아저씨도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에서는 여행 중인 한국인 아주머니가 내게 다가와 긴장을 풀어줬다. 예상과 다른 파리의 따뜻함 속에 그에 대한 내 생각은 빠르고 차갑게 식어갔다. 아이러니했다. 처음 보는 파리 시민들의 친절보다도 못해진 그와 나의 관계가 이성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와 함께 연인으로서 여행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내가 걱정되었던 건지 조금은 부드럽게 나를 배웅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침대에 누워 그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서 마음을 고백하기에 딱 적절한 그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최소한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진 우리가 연인이기로 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너와 헤어지고 싶어."
차근차근 오늘 정리한 내 감정을 그의 앞에 꺼내보았다. 그는 침착하게 듣고 있었다.
내가 예상한 건 오히려 상처를 받은 건 그쪽이라며 화를 내는 모습이거나 다시 어제의 일로 잘잘못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차분하게 오늘과 어제의 행동을 사과하더니, 예전에 전화로 나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이 여행은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 거야. 유럽까지 왔잖아.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만큼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밌게 시간 보내보면 어떨까."
사라져 가는 기억들. 마지막 기억을 앞에 두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이 마지막 순간을 마음껏 즐기자고.
그와 런던에서 여행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에게 더 투정을 부렸을 수도 있다. 헤어지는 게 맞는 거라며 그의 단점을 하나하나 찾고, 복잡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의 말을 듣고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지운 채 여행의 순간들에 집중했다. 때로 미래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때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다투지 않았다. 우리의 여행은 점점 소중해져 갔고, 우리는 그걸 느꼈다.
여행이 끝나고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여행이 우리의 좋은 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여행은 좋을 거니까. 근데 여행이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어.' 예상보다도 훨씬 좋은 여행을 했던 우리는 과연 헤어질 수 있었을까.
혁오의 <공드리>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있다. 하얀 눈 밭 위에 앉은 남녀가 고요히 서로에 집중하며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모습. 후에 이 노래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지어진 노래라는 얘기를 들었다.
때로 너무 많은 고민과 걱정들이 우리의 마음을 흐려놓는다. 현재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예전만큼 사랑스럽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내가 한때 예뻐했던 풍경을 더 이상 아끼지 못하게 한다. 그럴 때는 마음을 비우면 처음 그들을 사랑했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가 역순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박지선 교수는 '관계에서 우리가 갈등하고 싸울 때 처음 사랑에 빠진 그 마음으로 돌아가보면 어떨까'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