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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jelly Nov 25. 2021

어쩌다 이렇게 치열해졌을까.

대학시절 내가 생각한 직장인의 로망은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영자신문을 들고 바쁘게 출근하는 커리어우먼이었다. 그 시절 개봉했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비서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가 연신 'Excuse me'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모습이 나는 그저 멋있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취업난이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이직도 쉬는 기간 없이 매번 참 운좋게 잘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자연스럽게 커리어는 쌓여갔고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러던 중 업계연봉 상위수준의 기업에 이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로망은 그저 로망일뿐이라는 걸 몸소 매우 격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들어간 자리는 몇개월 간 사람이 3번이나 바뀌었던 자리였다는 걸 입사 후 알게 되었고, 입사 후로 잠을 편하게 잤던 적 손에 꼽을 정도였다. 꾸는 꿈은 거의 둘 중 하나였다. 시험 공부를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시험을 보고 있거나 대중교통을 잘못 타서 지각하거나...


매일 저녁 알람을 맞춰 놓지만 항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해도 출근해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하나둘 생각 났고 곧 지끈지끈한 두통이 몰려와 더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켰다 껐다 반복하며 시간을 확인하다 알람을 맞춰 놓았던 시간이 되면 그제서야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좀 더 빨리 출근준비를 하면서 여유를 부려도 될 법 한데 나는 단 한번도 더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왠지 쉬는 시간을 빼앗기는 듯한 손해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느샌가 쉬는 것에 강박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출근을 하면 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처리가 빠른 편인데도 불구하고 수시로 새로운 업무들이 생기는 일이 잦아 항상 시간에 쫓기듯 일했고 화장실도 뛰어서 다녀오곤 했다. 새로운 업무가 들어오면 바로 쳐낼 수 있도록 대비해야 했기에 늘 긴장 상태로 일했다. 일자목과 어깨통증은 덤이었다.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던 두통을 달고 살았고, 연차가 쌓여 갈수록 몸의 긴장상태도 지속되니 몸도 망가져가고 있었다. 같은 팀 과장도 스트레스에 한몫했는데 결혼 전에는 갖은 히스테리를 부리며 괴롭히더니 결혼한 이후에는 더욱 일을 떠넘겼다. 육아휴직도 들어가기 이틀 전에 갑작스럽게 통보하고 고작 A4 용지 한장만을 인수인계서로 남긴채 들어가버려 멘붕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럽게 인력충원도 되지 않은 채 파트장을 맡게 되었고 업무 강도와 비중은 더 크게 늘어났다.


매일을 치열하게 일했고 녹초가 되어 퇴근하길 반복했다. 너무 힘들어 퇴근하고 집에 오면 눈물이 났다.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화가 났다. 이 세상이 나를 일분 일초가만 놔두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정적인 생각과 기운만 가득했던 것 같다. 주말에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강박과 피해의식이 생겼고 어느 순간 삶의 주체성도 사라져있었다. 나는 살아가고 있는게 아니고 살아지고 있었다. 어느샌가 나는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최대한 티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것조차 힘든 날이 많아 괜한 짜증을 내는 날도 많아졌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마음을 다시 잡고 힘들어하고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진작부터 그만두라는 얘길 들었지만 내 고집으로 꼬박 5년을 버텼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루라도 연차를 쓰면 그 다음 날의 후폭풍이 두려워질 정도였으니까. 힘들지만 당시 나에게 선택지는 쉬면서 이직을 준비하거나 버티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쉰다는 건 결코 나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나중에 후회를 할 것 같아서 내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겠노라 다짐했다.


몸과 마음이 지치니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시간에 친한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것 리프레쉬가 아닌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심시간마다 좀 쉬고오겠다고 말하고 회사에서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렇게 한시간 동안 책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음악을 들으면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것 같았다.


그 당시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모셔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힘들었다고 말하는 한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현재는 시골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화면에 나온 그 분의 모습이 정말 너무 행복해보여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삶을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게 맞나?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당시 나는 회사가 너무 끔찍했다. 끔찍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내 고집으로 버티고 다니고 있지만 이 생활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평일이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고민하고 또 몇 달을 고민하다 그 고민의 시간만 1년 넘었을 때, 더는 내 상태가 버티고 걸어갈 길마저 없는 절벽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진짜 나를 위해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버텼고 이제는 살아지는게 아니라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힘든 결심이었던만큼 정말 많이 울었다. 지칠데로 지쳐버린 내모습이 너무 슬펐던 것 같다.



다행히도 나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인 신랑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동안 몇년동안 힘들어하는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신랑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힘들면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언제든 그만두어도 된다고 항상 얘기해주었지만 내 고집때문에 말리지 못하고 그 시간동안 옆에서 얼마나 같이 힘들었을까. 그래도 티 한번 내지않고 항상 배려해줘서 정말 고맙다.


아직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정확히 그림을 그려내진 못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렴풋이 스케치의 시작점은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쁜건 나쁘다. 정말로 그렇다.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다른 사람과 긍정적인 기운을 나누기도 힘들고 배려도 할 수 없게 된다. 내 마음조차 돌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남 배려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회사를 다닐때 가족들은 내가 항상 바쁜걸 알아서 나에게 편하게 전화 한통 하지 못했고, 가끔 전화통화 할때면 첫 마디는 늘 '바쁜데 미안해' 였다. 그러면 나는 '괜찮아. 빨리말해줘' 라고 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가겠다고 하면 주말에 피곤한데 쉬라고 하셨고 한번 오라는 말도 쉽게 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나 또한 힘들어 가족들을 잘 챙기지 못했다. 엄마가 아프셨을 때가 있었는데 난 그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당장 휴가를 써서 몇일 간 옆에 같이 있어드리고 싶었는데 막상 그러지 못했다. 아 나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싶었지만 차마 다 내팽겨치고 갈수가 없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다행히 언니가 가까이 살면서 평소에도 잘 챙겨드리고 있어서 언니에게 고마울뿐이었다.  언니한테 매번 고마웠고 가족에게 미안했다. 친구들과 주말에 약속을 잡는 것 또한 마냥 즐겁지 않았다. 물론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늘 항상 쉬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밖에서 시간을 갖는 건 자체를 꺼려했다. 쉰다고 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것도 아니고, 에너지가 회복이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온전히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글로 쓰고 보니 이건 그냥 시체 아니면 좀비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엇을 위해 저렇게 살고 있었던 걸까 싶다. 저렇게 살면서 얻는게 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무엇 때문에? 뭘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오랜만에 친한 언니들을 만났을 때 언니들이 당분간 좀 쉬라고, 뭐가 가장 먼저 하고싶냐고 물어봤을 때 집 앞 공원에서 신랑이랑 돗자리 깔고 앉아서 쉬는거라고 했더니 정말 소박하다고 했다. 마침 그 날 저녁 신랑이랑 집 앞 공원에 가기로 약속 했었던터라 맥주며 돗자리며 다 챙겨 공원까지 갔다가 코로나가 심해져 공원을 모두 막아놔서 막상 돗자리를 펴보지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긴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여름밤 신랑 손 잡고 돗자리와 맥주를 들고 슬리퍼 끌며 공원을 다녀온 그 잠깐이 꿈만 같았다. 평일 오전 요가 수업을 듣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것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여름철 매미소리가 너무 평화로와서 가던 길을 멈추고 눈을 감고 몇 초간 매미소리를 감상하는 것도 힐링이었고, 햇살 밝은 낮에 책을 읽으면서 마시는 아이스라떼가 정말 고소했다. 아 그래 이런게 행복이지 싶었다!


나는 이런 치열한 삶이 경제적인 윤택함을 가져올지언정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경제적인 윤택함이 그동안의 불행을 상쇄하고 더 많은 결과물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치열한 삶은 파괴력을 갖는다. 그 치열한 삶의 기간은 건강과 정신을 파괴시킨다.

아무리 많은 돈을 모았다 한들 그 이전의 건강을 되찾을 수 없고, 그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물론 돈이 시간을 벌어주는 이점이 있지만 돈이 많아지기까지의 시간과 결국 맞바꾼게 아닐까.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바로 지금, 오늘 행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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