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리 Dec 06. 2023

왜 고민하니? 기도할 수 있잖아

대학교 2학년 때, 현대 철학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같이 들으며 '썸'을 탔던 오빠가 있었다. 같은 팀이 되어 조별 과제를 하면서 친해졌다. 당시 교수님이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해보라고 했을 때, 썸 오빠는 자신을 독실한 크리스찬이라고 소개했고, 나는 '저는 염세주의자입니다' 같은 대2병, 아니 중 2병스러운 소개를 했다. 그때 썸 오빠는 ‘바로 저 여자야, 내가 찾아서 데리고 가야 할 어린 양!’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인지, 이후 나에게 호감을 보였다.      


나는 그 오빠와 절대 잘 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반미운동이 한창인 학생회에 기웃거리며 선배들이 유인물을 나눠 주거나 대자보 쓰는 걸 돕는 이른바 ‘좌파 학생’이었을 뿐 아니라, 자존감도 낮고 성격도 어두웠다. 하지만 다정한 데다 잘 생기고 적극적이기까지 한(흠, 무슨 이런 순정만화 같은 일이!) 남자의 데이트 신청을 뿌리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와 몇 번 데이트를 하였다. 하지만 내가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나는 즐겁지 않았다. 나의 자리는 유독 컴컴한 반면, 그의 머리 위엔 스폿라이트가 비치는 듯했다.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내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세상이 너무 ‘뭣 같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 


“모리야, 왜 고민하니? 기도할 수 있는데."


그는 정말로 궁금한 듯 물었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상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고, 나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고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기도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던 기억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 이상 그 오빠와 만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러니까 내가 서른다섯 살이 되었을 때, 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울 생활을 접고 지방에 내려간 지 꽤 오래되었기에 다소 연락이 뜸해 있었던 터라 나는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모리야, 잘 지냈니? 나 서울 올라왔는데 한 번 볼까?”

“어머, 언니, 오랜만이야! 서울 놀러 왔어?”

“응, 놀러온 거면 좋겠지만, 나 사실 병원에 있어.”

“병원? 왜 무슨 일 있어? 누가 아프셔?”

“나 유방암 수술하러 올라왔어.”

그녀는 전이가 빨라 검진한 지 1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가슴을 거의 다 잘라내는 큰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고 슬퍼서 어쩔 줄 몰랐다. 이렇게 젊은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커다란 대학 병원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하지? 나는 이런 건 전혀 모르는데, 아니, 그보다 1년 만에 그렇게 전이가 빨리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검진을 언제 했더라, 나도 빨리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웅웅거리고 속이 메슥거렸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원실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얼굴이 하얗고 체구가 자그마하던 J 언니가 앉아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로 얼굴을 가리고 언니에게 달려갔다. 그때 J 언니가 해사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왜 울어,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가 오히려 나를 위로하는 형국이었다. 진심으로 그녀는 나의 놀람과 공포 불안을 다독여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 하느님 믿잖아.”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에 저렇게 처연할 수 있다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하느님에 대해서 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썸 오빠와 J 언니는 같은 말을 했지만, 젊은 날의 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중년의 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시간의 누적은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게 했다. 

     

모태 신앙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와 비슷하지 않으려나 생각한다. 젊은 시절엔 자신이 넘친다. 뭐든 해보고 싶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중년이 되면서 심신이 쇠퇴하는 것을 느끼고, 주위에 하나둘씩 아프고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며 교회나 절에 한 번 다녀보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도 아이를 빌미 삼아 교회에서 하는 ‘유아 교회학교’에도 다녀보고, 불교 경전을 열심히 읽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도 건강할 때 지켜야 하듯이, 마음이 힘들 때 갑자기 종교 시설에 간다고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에 더 조급하고 불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또 절이나 교회에서 신도를 돈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보다 더 세속적인 듯 보이면 금세 실망하고 마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춤인 것이 유튜브였다. 정말 좋은 세상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법륜 스님, 법상 스님, 크리스찬인 김주환 교수님 등을 시공간을 초월해 일대일로 만나 종교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다. 기독교적 설교는 순응과 복종을 강조해서,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기대고 싶을 때 들으면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법문은 수련과 정진의 종교라 기운은 좀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때 들으면 지도를 보여주는 듯했다. 좀 외롭긴 해도 구독으로 십일조를 대신하고, ‘반려견 제사 지냅니다, 등불 하나에 35000원’ 문구가 걸린 현수막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불교와 기독교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내 구미에 맞게 배합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 이라고 말했다지만, 실제 진통제에는 소량의 아편이 들어간다. 어느 정도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아편은 약이 되기도, 마약이 되기도 한다. 종교가 없어도 종교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수가 아니지만 노래를 자주 부른다거나 운동 선수가 아니지만 매일 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심리학자인 서은국 교수가 그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이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언급한 것처럼, 나처럼 시간이 많아 자주 법문을 듣고 설교를 듣는다면, 매우 바쁘다가 일주일에 한 번만 종교 시설에 가서 후딱 해치우듯 기도와 절을 하고 오는 사람보다 더 종교적일 수도 있지 않으려나.    

 

이삼십대에는 지적인 탐구, 심리 치료, 해외여행이나 새로운 취미, 화려한 뮤지컬 같은 새로운 자극으로도 불안이나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수 있었지만, 중년이 되고 나도 주위 사람들도 자주 아픈 상황을 접하면서부터는 죽음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종교적인 가르침 없이는 계속 허전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나저나 썸 오빠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태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을까? 20년 전 만났던 타락한 어린 양이 이제는 허허실실한 아줌마가 되어 유투브에서 ‘좋은 설교 추천’을 검색하고 있는 걸 알면 그래도 조금은 기뻐할 것 같다. 이제는 누군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고민하세요?'라고 묻는다면, '어이 없는 소리하시네요'라며 돌아서는 대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러게요, 뭐가 고민일까요. 기도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나쁜 상황에 있더라도 더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